NB23:22, “교회가 먼저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과 루델바흐의 논지
“교회가 먼저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다” – 키르케고르의 비판과 루델바흐의 논지
키르케고르는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하면 결국 우리 모두가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논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단순한 국가와 교회의 분리가 아니라, 그러한 시도가 결국 기독교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을 우려했다.
유사한 맥락에서 **루델바흐(A.G. Rudelbach)**는 그의 저서 *『개신교 교회 조직의 기원과 원칙(Den evangeliske Kirkeforfatnings Oprindelse og Princip)』*에서 국가교회(Statskirke)와 교황권 중심의 교회국가(Kirkestat) 모두에서 교회와 국가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종교적 자유(religionsfrihed)의 도입이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필수적이다라고 주장했다.
*“국가교회(Statskirke)의 시대에도, 교회국가(Kirkestat)의 시대에도, 교회와 국가는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관계였다. 표면적으로는 통일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서로 충돌하며, 양측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충돌이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종교적 자유가 도입됨으로써, 교회와 국가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되고, 오히려 이 다름을 기반으로 ‘진정한 일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Rudelbach, 『Den evangeliske Kirkeforfatnings Oprindelse og Princip』, p. 370)
루델바흐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경쟁하거나 억압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면서도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다. 시대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천년왕국(Millennium)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국가와 교회가 ‘자연과 신의 법’에 맞는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성과이다. 과거에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를 정복하거나 억압하는 권력 투쟁 속에 있었으며, 그 관계는 명백한 거짓(vitterlig Usandhed) 또는 자기기만(Selvbedrag)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양측이 공정한 관계를 맺고, 정의(Retfærdighed)와 공정성(Billighed)을 바탕으로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Rudelbach, p. 370)
키르케고르의 반론 – “그러나 기독교는 패배한다”
루델바흐의 논리는 국가와 교회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독립적인 관계 속에서 더 나은 공존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 논리가 기독교의 본질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즉, **“국가와 교회가 자유롭게 분리되면, 기독교도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논리는 결국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적 선택지로 전락시키고,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그러나 누가 너희에게 그런 목적을 위해 그처럼 세속적인 방법(투표와 법 개정)이 허용될 수 있다고 가르쳤는가?”
“그것이 정말 기독교적인 방법(Χstd.)인가?”
그리고 그는 더욱 강하게 선언한다. “설령 너희가 승리한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패배한다.”
“그 순간, 기독교(Χstd.)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포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단지 유대교, 이교(異敎), 그리고 모든 다른 종교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공존하는 하나의 종교로 전락할 것이다.”
이는 단순한 교회 행정의 변화가 아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기독교를 변화시키는 상황을 용인하게 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본 기독교의 본질 – “기독교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단순히 “많은 종교 중 하나”로 인정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을 상실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가 **“세상과 타협 없이 싸워야 할 종교”**이지, 세상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기독교는 강요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자들로 하여금, 고난을 통해 세상을 강요하도록 한다.” 즉,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이 기독교인이 되도록” 강제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도, 기독교가 단지 하나의 종교적 옵션이 되는 순간, 기독교는 이미 패배한 것이라고 보았다.
“교회가 자유롭게 되자마자, 기독교(Χstd.)는 스스로 자신의 절대적 권위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속적인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는 대신,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결론 – 키르케고르의 급진적 기독교적 입장
루델바흐는 국가와 교회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할 때, 오히려 교회가 더 순수해지고, 국가와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기독교가 단순히 세속적 체제 안에서 하나의 종교로 자리 잡게 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절대성(Χstds Souverainitet)이 상실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가 단지 “더 편리한 방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여전히 “세상의 주”로 남아 있는가가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타협하고 편리한 길을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근본적인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