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SION 2
The Issue Itself
개인의 영원한 행복은 역사적인 것과의 관계를 통해 시간에서 결정된다. 게다가, 역사적인 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본질상 역사적일 수 없는 것을 포함하며 결과적으로 모순에 의해 그렇게 될 정도로 역사적이다.
이 문제는 채워진 파토스(pathos-filled)이고 변증법적이다. 사람의 열정은 영원한 행복과 관계에서 절정에 이르므로, 파토스가 첫 번째 부분에 있다. 변증법적인 것은 마지막 부분에 있다. 어려움은 명확히 이 문제가 이런 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평범하고 단순한 파토스이다. 자신과 영원한 행복과 관계하는 것은 반성의 영역에서 평범하고 단순한 파토스이다. 변증법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즉, 개인이 자신과 적절한 파토스와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원한 행복이 부가되는 규정에 의해 변증법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이 규정은 결국 열정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일종의 선동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이 존재하면서 자신과 절대적 텔로스(목적)과 관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포기해왔다는 것을 표현하고, 이전부터 표현해왔을 때, 조건의 현존(presence of conditions)이 가능한 한 열정을 더 높게 끌어 올리는데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상대적 파토스와의 관계에서도, 변증법적인 것은 마치 불에 기름을 붙는 것과 같고, 내면의 범위를 확장하고, 열정에 강렬하게 불을 붙인다.
그러나 중요한 의미에서(sensu eminenti),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 의미를 망각했기에, 일반적으로 채워진 파토스를 상상력과 감정에서 유래한다고 보고 존재의 동시성에서 양자를 통일하기보다, 변증법적인 것이 이것을 폐기하려 하기에, 19세기의 철학적인 시대에 채워진 파토스는 불명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고, 변증법적인 것은 열정을 잃는 것이다. 마치 모순을 생각하기가 너무 쉽고 술술 풀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열정은 모순 속에서의 긴장이기 때문에, 이것이 제거될 때, 열정은 농담이고, 재치 있는 논평이다. 하지만 존재문제(existence-issue)는 채워진 파토스이고 변증법적이다. 여기에서 제시된 것은 파토스를 파악하기 위해 존재의 내면성(existence-inwardness)을 요구하고, 변증법적인 어려움을 파악하기 위해 사고의 열정(passion of thought)을 요구하고, 열정에 집중된다. 왜냐하면 그가 그 속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나는 무엇보다 먼저 채워진 파토스와 변증법적인 것을 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독자가 지속적으로 어려움은 결국 이 둘을 결합하는 데 있음을 상기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절대적 열정과 파토스로 채워진 존재하는 자, 그의 존재로 영원한 행복과 그의 파토스로 채워진 관계를 표현하는 그가, 지금 변증법적은 결단과 관계해야 한다. 그는 파토스가 가득한 긴장 속에 영원한 행복과 관계하는 만큼 소크라테스적으로 잘못 가운데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그의 노력이 가능한 가장 클수록, 착각은 더욱 쉬워진다. 왜냐하면 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사랑에서, 개인은 그럼에도 다른 사람과 관계하고 있고, 그 사람의 ‘예’나 ‘아니오’를 들을 수 있다. 모든 열정이 고무된 계획에서, 개인은 여전히 외적인 것을 가진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과의 관계에서, 개인은 내면 안에서 다루어야 할 자기 자신만을 가진다.
그는 모국어를 통해 무료로 말솜씨를 익힌다. 얼마 후 이런 저런 작은 말들을 자동으로 따라하는 법을 배운다. 외적으로, 영원한 행복에 대한 이념은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 왜냐하면 그가 외적인 것을 경멸하는 것을 배우고 유익한 것에 대한 세속적인 생각을 망각했을 때, 그것은 이미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 이런 개념의 부족이 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 없이도 ‘남편, 아버지, popinjay 슈팅 클럽의 대장’이 될 수 있다. 그가 그와 같은 것을 갈망한다면, 이 이념이 그를 방해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행복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파토스는 값비싼 대가로 획득되는 것이기에,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듯, 유한한 의미에서 그냥 미친 짓으로 여겨져야 한다. 즉, 영원한 행복은 사변적인 19세기에 시장 가격이 더 이상 인용할 수 없는 안전이다. 기껏 해야 존경받는 성직자들이 무식쟁이들을 속이기 위해 비슷한 종류의 소멸된 채권을 사용할 뿐이다. 기만은 쉽기 때문에 유한한 상식이 단순히 이 행복과 관련하여 어리석게 모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할 뿐이다. 사람의 삶이 사도를 닮아(a la) 변증법적으로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이 정도로 어리석어지는 이유이다. 영원한 행복에 대해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다루어야 할 자기 자신만을 갖고 있은 것과 관련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그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