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트 어만(Bart Ehrman)와 로버트 프라이스(Robert Price)의 논쟁은 실존적 관점에서 보면 “코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논쟁은 예수가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했는가, 즉 “예수라는 인물이 과거에 실재했는지 여부”에 대한 객관적, 역사비평적 논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에게 이런 질문은 신앙의 본질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우스꽝스러움(comisk)을 드러내는 것이다.
왜 “코믹한가”? – 키르케고르의 판단 기준
키르케고르가 말하길:
“신앙인은 자신의 구원을 객관적 증명에 매달 때 코믹하게 된다. 그가 진지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진지함을 증명 가능성에 던질 때 그는 우스꽝스러워진다.”
이 구조를 어만 vs 프라이스 논쟁에 대입해보자:
항목 | 바트 어만 | 로버트 프라이스 | 키르케고르의 시선 |
주장 |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다. 사료와 증거가 있다.” | “예수는 신화적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 둘 다 객관성의 싸움에 갇혀 있다 |
방법 | 역사비평, 본문비평, 고대 문헌 비교 | 종교사 비교, 신화이론 | 모두 근사치(approximation)의 영역일 뿐 |
목적 | 예수의 역사성 증명 | 예수 신화설 정당화 | 실존적 신앙에는 아무런 진입도 못함 |
결과 | “믿을 만한 역사적 인물” | “전설에 불과한 조작물” | 동시대성 없는 논쟁은 공허하며 우스꽝스럽다(comisk) |
키르케고르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이 그렇게 진지하게 논쟁하고 있는 건 알겠다. 하지만 당신들의 싸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이미 지나가버린 것 사이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핵심 요약
• 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존재했는가’가 아니라 ‘지금 그 예수가 나와 함께 존재하는가’이다.
• 바트 어마노와 로버트 프라이스는 모두 실존적 동시대성을 회피한 채, 증명-반증 게임에 빠져 있다.
• 그들의 논쟁은 교양 있는 지성들의 역사적 사유처럼 보이지만, 키르케고르의 눈에는 아이러니와 코미디로 보인다.
결론:
동시대성이 없는 예수 논쟁은 모두 실존의 바깥에서 벌어지는 우스꽝스러운 무용담이다.
결국 “믿을 수 있다”와 “믿을 수 없다”의 논쟁은, “나는 지금 누구 앞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피하기 위한 회피일 뿐이다.
부가: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주장 분석
키르케고르의 ‘동시대성(den Samtidighed)’ 개념과 역사적 기독교(Christendom)와 실존적 기독교(Christenhed)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과거의 사건으로서의 예수는 ‘증명’의 대상이지만,지금 이 순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동시대적 관계’를 맺는 것은 ‘존재’(Tilværelse)의 문제다. 후자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실존의 응답을 요구한다.
이제 구절 하나씩 분석한다.
구절 분석
🔹 “역사적 증명보다 더 높은 것은 동시대적 존재(den samtidige Tilværelse)이다.”
• 여기서 말하는 “더 높다(højere)”는 건 존재론적·실존적 우위를 말한다. 역사적 증명은 과거 사건의 객관성을 추적하는 것—예: “예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그가 기적을 행했는가?” 등. 그러나 동시대적 Tilværelse는 지금 내가 그 예수와 ‘함께’ 살고 있는가?, 그를 따르고 있는가?, 그를 통해 나의 존재가 새롭게 생성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 키르케고르에겐 이 두 가지가 하늘과 땅만큼 다른 차원이다.
🔹 “과거에 대한 모든 규정은 증명을 요구한다.”
• 맞다. 역사적 진술은 언제나 “그때 그것이 있었는가?”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며, 따라서 증명이 필요하다.
• 예: “예수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그가 부활했는가?”→ 이런 질문들은 모두 역사학적·증명 가능성의 세계에 속한다.
🔹 “네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말에 “그건 넌센스다”라고 답하는 것이 옳다.
• 이건 아주 중요한 실존론적 포인트이다. 내가 지금 “존재한다(er til)“는 건,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실성이다. 그건 내가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살고 있고 응답하고 있는 것 자체다.
• 키르케고르에게 Tilværelse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실존 그 자체를 뜻한다.
🔹 반면 “나는 지금 존재하는데, 400년 전에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람으로 있었다”는 말엔 증명이 필요하다.
• 당연히 그렇지. 왜냐하면 시간과 거리가 개입된 경우, 우리는 주관적으로 ‘살고 있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성은 증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역사적 예수와 실존적 그리스도 사이의 간극을 드러낼 때 자주 쓰는 논법이다.
🔹 “린드버그 같은 노련한 변증가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특이하다.”
• 여기서 “린드버그”는 기독교 변증론자들(apologists)의 대표 격으로 풍자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와 역사적 사실성을 논리적·객관적 증명을 통해 수호하려 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묻는다.
“그 모든 역사적 증명이, 실제로 지금 예수 앞에 존재하는 너를 만들어줄 수 있는가?”
그에겐 대답은 “No”이다.
🧩 결론: 이게 의미하는 바는?
키르케고르의 주장 | 설명 |
역사적 기독교 |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 신념 → 증명을 요구함 |
실존적 그리스도교 | 지금 이 순간 동시대적 관계 안에서 예수와 존재하는 것 → 증명할 수 없고, 다만 살아야만 함 |
Tilværelse | 존재함, 지금 여기에 있음.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실존의 응답. |
신앙 | 과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와 동시대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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