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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NB 28:77 Pap. XI1 A22(기독교의 본질, 완전성에 대하여) 본문
NB 28:77 Pap. XI1 A22, 1854년
기독교
상황은 확실히 이와 같다. 사람 되신 하나님(God-man)은 물론 한 번 이상 살지 않고 속죄자로서 한 번 이상 죽지 않는 모범(Forbilledet)이시다.
사람 되신 하나님은 모범이시다. 따라서 기독교는 존재에 의해 실행되는 시험이다. 당신은 제자인가? 혹은 어쨌든 자신을 진리 안에서 이 모범과 관계하고 있는가?
모든 각 세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기독교 역사에 대한 모든 일은 쓰레기이고, 악한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무조건적인 것과 관계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대대로 근사치(approximation)의 문제로 바꾸는 것, 이것은 쓰레기이다. 왜냐하면 요구 조건이 <이것이냐/저것이냐>일 때, 세대별 노력의 일부는 허튼 짓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백만의) 연합과 싸우기 원하는 것은 허튼 짓이다. 왜냐하면 요구조건이 <이것이냐/저것이냐>인 곳에서, 숫자로 나타나는 요소는 그냥 횡설수설(gibberish)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고 싶어 한다. 무지에 의해 누구도 변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물론 시험의 결과는 다른 문제이다.
모든 각 세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따라서 여기에 놀랍고도 충격적인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기독교 세계’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 같은 것 말이다. 새로운 세대는 실제로 책임을 지고 신약성서를 조사해야 하고,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가 다를 수도 있기에 기독교적 충돌은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 다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전 세대에 대한 직접적 연속성에 대한 것, 조상들의 믿음을 고수하는 것에 대한 것은 쓰레기이고 악한 것이다. 아니, 우리는 신약성서만 가진다. 모든 각 세대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세대가 이전에 지나갔던 사람들과 관계하는 한, 그것은 직접적인 선조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일을 재해석했던 대로, 기독교가 완전할 수 있다는 것, 역사를 가질 수 있다는 것 등이 사실이었다면, 하나님 되신 사람은 몇 세기가 지난 후 모든 것은 너무 변해서 기독교가 무엇인지 그분이 묘사한 것은 더 이상 적용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말하지 않고서는 이 땅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Saaledes er nok det sande Sammenhæng.
*Gud-Msket er Forbilledet, der natur|[140]ligviis ikke lever mere end een Gang, saa lidet som han *qua Forsoner døer mere end een Gang.
Gud-Msket er Forbilledet. Χstd. er saa Tilværelsens Examination: vil Du være en Discipel eller dog idetmindste sandt forholde Dig dertil.
Der begyndes forfra med hver Generation – alt dette om Χstdommens Historie er Vaas, Gavtyvestreg; *item er det Vaas at forvandle Spørgsmaal om ubetinget at forholde sig til det Ubetingede til en *fra Slægt til Slægt fortsat *approximerende Stræben thi hvor Fordringen er enten-eller der er en] Brøksdeel af en Generations-Stræben Nonsens; item er det Nonsens at ville i Forening (maaskee millionsviis) stræbe, thi hvor Fordringen er enten-eller der er det Numeriske Galimathias.
Χstd. vil forkyndes for Alle, Alle – den] vil at Ingen skal kunne undskylde sig med Uvidenhed, men Examinationens Udfald er jo noget Andet.
|141Der begyndes forfra med hver Generation. Heri ligger saa Muligheden af, at de frygtelige, sande christelige Collisioner kan fremkomme ogsaa i »Χsthed« *at hade Fader og Moder o: s: v: Idet nemlig den nye Slægt skal paa sit eget Ansvar see til i det nye Testamente hvad Χstd er, kan maaskee Opfattelsen] blive saa forskjellig at en christelig Collision bliver mulig. Thi, christeligt, er atter Dette Vaas og Gavtyvestreeg, dette om den ligefremme Continuitet med forrige Generation, om at holde fast ved Fædrenes Tro o: s: v: Nei, vi har kun det nye Testamente, og hver Generation har at begynde forfra, og forsaavidt, hvis den har Noget med et Foregaaende at skaffe, med Revision af det nærmest Foregaaende.
Dersom det forholdt sig saaledes som vi Msker have lavet det om, *at Χstdom er perfectibel har Historie |25, 277o: s: v: saa er det ligefrem uforsvar|[142]ligt af Gud-Msket at forlade Jorden uden at sige forud, at efter nogle Aarhundreders] Forløb vil Alt være saaledes forandret, at hans Beskrivelse af hvad Χstd er slet ikke mere pas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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