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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보상에 대한 기도, Paper 340:16 Paper 340:16 …그래, 물론이다.덕과 선은 그 보상을 받는다- 이것은 확실하다, 영원히 확실하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이보다 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덕은 그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받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보라, 덕은 그 보상을 ‘배은망덕’(ingratitude)으로 받는다. 우리가 “덕은 보상받는다”라고 말할 때 말하는 그 보상은 이것이 아니지만, 이 배은망덕은 언제나 ‘먼저’ 오는 보상이다. 덕은 그 보상을 받는다-그 보상은 ‘죽음’이다. 우리가 말하는 그 ‘참된 보상’은 이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덕의 보상이며, 그것이 ‘가.. 더보기
Not7:18, Pap. III A 104, 축복에 대한 단상 Not7:18, Pap. III A 104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빛을 선한 자와 악한 자 위에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자신의 태양을 비추게 하시는 것은 단지 가시적인 세계에서만이 아니다 - 그분은 실제로 매 주일, 자신의 교회 안에서 그분의 축복을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위에 비추신다. ✦ 마태복음 5:45의 신학적 적용: 하나님의 은혜는 세상적으로나 교회 안에서도 '차별 없이' 주어진다. 하지만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자격과 무관하게 주어짐을 드러내는 동시에, 예배 공동체조차 그 안에 의인과 불의가 섞여 있음을 함축한다.해설덴마크 교회 예식서(Kirke-Ritualet), 31쪽에 따르면, 목사는 설교의 맨 마지막을 작은 축원으로 마무리하고, 회중 위에 다음과 같이 축복을.. 더보기
JJ:151, Pap. IV A 148 “위대한 천재는 결코 약간의 광기를 동반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것은 세속적인 표현이지만, 이는 곧 종교적 명제의 세속적 변형이다. 즉, “신이 어떤 사람을 종교적으로 축복하면, 그는 동시에 세속적으로 저주받은 자가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첫 번째(종교적 축복)는 존재(tilværelsen)의 경계(grænse)에 그 근거를 두며,두 번째(세속적 저주)는 존재의 이중성(dupplicitet)에 그 근거를 둔다.해설이 문장은 “위대한 천재는 결코 약간의 광기를 동반하지 않은 적이 없다” (Nullum exstitit magnum ingenium sine aliqua dementia)는 라틴어 격언이 **세네카(Seneca)**의 De tranquillitate animi 17.10을 변형한 표현임을 .. 더보기
NB23:158, Pap. X4 A162아우구스티누스 NB23:158, Pap. X4 A162아우구스티누스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진리성(Χstds Sandhed)을 입증하는 근거로 몇 가지를 제시한다. 1. 예언의 성취 (Spaadomme)2. 기독교의 역사적 영향력 (den historiske Virkning)3. 기독교인의 통일성,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된 모습이 철학의 분열과 대조적이기 때문에 철학은 다양한 사상으로 갈라지고 분열되지만, 기독교는 하나로 모인다그러나 이 논증(기독교의 통일성)이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고 지적된다. 왜냐하면 철학(Philosophie)과 종교(Religion)의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철학보다 더 강한 결속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 및 의미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진리성.. 더보기
NB23:156, Pap. X4 A160아우구스티누스 NB23:156, Pap. X4 A160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후기의 저술에서 자신이 젊었을 때 극장(Theater)에 빠져들었던 경험을 회고한다. 그는 비극(Tragedie)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미적 슬픔(æsthetiske Sorg)”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기모순적임을 강조한다.그가 비판하는 핵심은 비극이 연민(Medfølelse)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연민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비극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도록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고통을 감상하며 즐기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이러한 ‘고통을 향유하는 즐거움’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것.. 더보기
나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흔히 **“나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는 말을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년경)**이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이 표현은 터툴리안이 직접 한 말이 아닙니다. 📌 1. 터툴리안이 정말 “Credo quia absurdum”이라고 했을까?터툴리안의 저서 De Carne Christi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에서 그는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사용한 문장은 다릅니다.원문: “Et sepultus resurrexit, certum est quia impossibile.” (그분이 무덤에 묻혔으나 부활하셨다. 이것이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 더보기
NB23:152, Pap. X4 A156암브로시우스(Ambrosius) NB23:152, Pap. X4 A156암브로시우스(Ambrosius)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상처는, 생명을 잃게 하는 상처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확장시키는 상처이다.” 암브로시우스는 성도들에게 간청하며 외친다.“부디,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이 전투가 일어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저 관객(Tilskuere)이 되어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한 도시가 운동선수(Athlet)를 가졌다면, 그는 경기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여러분은 더 큰 일 앞에서 이 작은 일들에서 보였던 태도를 버리려 하십니까?”(출처: Böhringer, 1권, 3부, p. 35) 암브로시우스의 이 말은 매우 강력하다.“기독교인은 강한 사람과 같다. 그렇다면, 그가 핍박(persecu.. 더보기
NB23:151, Pap. X4 A155암브로시우스(Ambrosius) NB23:151, Pap. X4 A155암브로시우스(Ambrosius)사람들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게 아리우스파(Arianerne)에게 교회를 넘겨주도록 요구했다. 황제(Keiseren)의 사절(使節, Udsendinge)들이 암브로시우스가 머물고 있던 주교좌 성당(Hovedkirken)에 찾아와, 황제의 권리(Ret)에 따라 교회를 내어줄 것을 명령했다. 이에 암브로시우스가 대답했다. “만약 황제가 내 개인 소유물을 요구한다면, 나는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모든 것이 가난한 자들(de Fattige)의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Gud)이라면, 황제에게는 아무런 권한(Ret)도 없다!”“너희들이 내 재산(Gods)을 원하느냐? 가져가라! 내 생명(Liv)을 원하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