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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감탄과 의심 사이,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143쪽 주석

이 주석은 키르케고르가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에서 언급한 “그 고귀한 현자(hiin ædle Vise)”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왜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나이가 들어 감탄하기 시작했다”는 방식으로 묘사되었는지를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철학적 배경을 통해 설명합니다.

 


◄ “그 고귀한 지혜자(hiin ædle Vise)” … “감탄하기 시작했다(begyndte at forundre sig)” →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itetos)』(155d)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다음의 유명한 발언을 가리킨다:

 

감탄(θαυμάζειν)은 지혜를 사랑하는 이의 본래적 상태이다. 철학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 있다.(독일어 번역: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Platons Werke, 제2부 1권(제3권), 1818, p. 212 /덴마크어: Platons Skrifter, 제6권, p. 111 참조)

 

또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ikke begyndte med at tvivle om Alt)”는 표현은 철학사에서 잘 알려진 라틴어 격언 “De omnibus dubitandum est”, 즉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를 비판적으로 겨냥한다. 이 격언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자연과학자인 르네 데카르트(1596–1650)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저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 1644)』 제1부 §1의 표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리를 탐구하려는 자는, 인생에서 한 번은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Veritatem inquirenti, semel in vita de omnibus, quantum fieri potest, esse dubitandum)

(출처: Renati Des-Cartes opera philosophica, 엘제비어 출판, 암스테르담 1677–78년판, 제2권, p. 1)

 

이 문장은 과학적 인식의 확고한 기초를 찾기 위해 모든 전제를 한 번 철저히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를 의미하며, 데카르트 철학 체계의 출발점이 된다. 이 격언은 훗날 헤겔의 철학사 강의에서도 인용되었고, 키르케고르 역시 이 문구를 이미 1842–43년에 쓴 미완의 작품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또는 De omnibus dubitandum est』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참조: Papirer IV B 1)

 

이 격언은 19세기 덴마크 헤겔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논쟁되었으며, 특히 H.L. 마르텐센J.L. 하이베르그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마르텐센은 1835년에 발행된 『왕립 군사 고등학교에서의 논리학 강의 입문』에 대한 서평 (Maanedsskrift for Litteratur 제16권, 코펜하겐, 1836년, p. 518)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이제 표어는 이렇다: ‘의심은 지혜의 시작이다.’”

 

하이베르그 또한 자신의 잡지 Perseus (1837년 6월호와 1838년 8월호)에 실린 “로테 박사의 삼위일체 및 화해 교리에 대한 서평”(p. 35)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심은 철학적 체계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지혜의 시작이기도 하다.

 


📌 요약 정리:

 

키르케고르가 인용한 인물 소크라테스
인용 출처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55d
핵심 개념 감탄(θαυμάζειν)은 철학의 시작이다
대조되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주장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방법적 회의에서 철학은 시작된다
키르케고르의 태도 데카르트적 ‘보편적 회의’를 비판하며,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가 감탄하는 태도”, 즉 실존적 경외심을 강조함

 

 


“감탄(thaumazein)”과 “의심(dubitare)” 사이

 

‘감탄(thaumazein)’과 ‘의심(dubitare)’의 관계는 철학의 기원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을 상징합니다. 키르케고르는 이 둘을 단순히 철학사적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실존의 시작,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눈뜨는 방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내면의 길”과 깊이 연결시킵니다. 이제 이 두 개념을 차근차근 비교하고, 키르케고르가 어떻게 이 관계를 해석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1. 철학의 두 기원: 감탄 vs 의심

구분 감탄 (θαυμάζειν) 의심 (dubitare)
대표 소크라테스, 플라톤 데카르트
정의 존재의 신비 앞에서 생기는 놀람과 경이 인식의 불확실성 앞에서 생기는 회의
출발점 존재에 대한 열림 – “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지식의 기초를 위한 폐쇄 – “무엇이 확실한가?”
태도 수용, 경외, 내면의 열림 분석, 해체, 확실성 추구
목적 진리를 사유하고 존재와 만나는 삶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의 기반 마련

 

플라톤은 철학의 시작을 이렇게 말합니다:

“감탄은 철학을 사랑하는 자의 본질이며, 철학은 이 감탄에서 시작된다.”(Theaitetos 155d)

 

반면 데카르트는 『방법서설』과 『철학의 원리』에서 말합니다:

 

“한 번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De omnibus dubitandum est)

 


🙍‍♂️ 2. 키르케고르: 의심은 회피이고, 감탄은 진입이다

키르케고르는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를 철저히 비판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는 출발점은 하나님 앞에 선 실존자의 입장과는 정반대라고 봅니다. 왜일까요?

 

▶︎ 1) 의심은 책임을 유보한다

데카르트식 의심은 “나는 아직 모르니 판단을 보류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이것은 실존적 책임을 피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의심은 열지 않고 닫는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지적 방어일 뿐이다.”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De omnibus dubitandum est』)

 

▶︎ 2) 감탄은 존재의 진리 앞에 서는 자세이다

감탄은 인간이 자기 존재와 세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깨어나는 첫 번째 정서입니다. 감탄은 ‘논리적 출발점’이 아니라, 실존적 문지방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감탄은 단순히 “와! 신기하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고, 내가 있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는 절대적 수용의 자세입니다.

 

그는 『건덕적 강화』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새와 백합에게 배우라, 143쪽)

 

“많은 철학자들이 더 많이, 더 정확하게 말했지만, 아무도 그 고귀한 지혜자만큼 감탄하지 않았다.”→ 그는 이 감탄의 자리를 철학의 진정한 출발점으로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 3. 감탄과 의심의 관계: 전복된 순서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이 두 감정은 단순히 병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순서 데카르트식 전개 키르케고르식 전개
1단계 의심: 모든 것을 보류 감탄: 존재의 신비 앞에서 깨어남
2단계 이성적 확실성 확보 불안: 나 자신의 불완전함 자각
3단계 자기 존재의 근거 설정 신앙: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맡김
결과 이성적 자아 확립 단독자의 실존 형성

 

 


✨ 감탄은 실존적 진리의 시작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진리는 확실한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마주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는 나의 전 존재를 요구한다.”

 

따라서 감탄은 철학의 시작점이 아니라, 신앙적 실존이 열리는 문입니다.

 


✅ 결론: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감탄과 의심

구분 감탄 의심
인간의 자세 신비 앞에 열리는 실존 불확실성 앞에 닫히는 이성
핵심 태도 경외, 수용, 눈뜸 분석, 보류, 유보
철학의 성격 존재를 향한 열림 인식을 향한 폐쇄
실존적 전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가 되는 길 자기보호적 거리두기
키르케고르의 선택 감탄을 통해 진리에 이르고자 함 의심을 통해 진리를 상실한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