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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예수는 왜 노예를 해방하지 않았는가?

 

고린도전서 7장 21절 같은 구절을 통해 “왜 바울이나 예수는 노예해방을 외재적으로 직접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은 단지 역사적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실존의 내적 혁명과 외적 구조 변화 사이의 긴장을 건드리는 깊은 질문입니다.

 


1.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본 이유

(1) 로마 제국 하의 현실

 예수와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는 로마 제국의 노예제도가 전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통합된 구조였습니다.
 인구의 1/3이 노예였을 정도로 일상 그 자체였고, 경제, 정치, 가정의 기반이었죠.
 이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즉각적이고 잔혹한 탄압과 공동체의 말살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즉각적인 외재적 혁명을 촉구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전략적 현실 인식이 담긴 신중한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2. 예수와 바울이 택한 방식: 내적 혁명에서 오는 외적 균열

(1) 예수의 방식: 실존적 해방

 예수는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고 하며,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의 해방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물리적 해방 운동가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깊은 속박과 자기기만으로부터의 해방자였습니다.

 

예수의 해방은 “단순히 체제를 뒤엎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급진적 방향을 지녔습니다.

 

(2) 바울의 방식: 관계의 전복

 바울은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빌레몬에게 권합니다(빌레몬서).
 바울은 사회적 신분 질서 자체를 당장 폐지하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 그 구조를 안에서부터 전복시키려 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

 

이것은 곧 신분의 본질을 무력화하는 신학적 선언이었으며, 현실 구조는 그대로이되, 관계의 혁명을 통해 그 구조를 흔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3. 왜 외재적 혁명이 아니라 내적 실존에서 출발했는가?

 

(1) 기독교는 먼저 존재를 묻는다

 예수나 바울은 단순히 “노예냐 자유인이냐”의 조건을 바꾸기보다, “너는 누구인가? 진정 자유인인가?“라는 존재의 상태를 묻습니다.
 아무리 자유인이더라도 죄의 종이면 진정한 자유가 아니며, 반대로 사회적 종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면 존재의 해방을 맛본 것입니다.

 

(2) 기독교는 내면의 자유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바꾼다

 초대교회의 놀라운 점은, 노예와 주인이 함께 성찬을 나누고, 형제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질서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급진적 전복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존재의 질서에서 출발하여, 관계를 전복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4. 그럼에도 남는 물음들

 예수나 바울이 더 직접적으로 노예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후대 교회가 잘못 이용한 면도 있습니다.
 특히 서구 기독교는 바울의 말을 오용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말한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는 말을, 단순히 개인적 해방이 아니라 사회 구조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열린 태도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5. 결론: 기독교 해방의 방향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외적 구조로 나아가는 것’

 기독교는 단지 외적 혁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인간 실존의 내면적 전환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구조적 악에 눈 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랑과 형제됨이라는 새 질서를 통해, 현실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자유의 본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 본질은 외재성이 아니라 내재성입니다. 더 정밀하게 표현하자면, 기독교의 자유는 내재성 안에서 발생하고, 외재성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1. 기독교적 자유는 존재론적 자유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기독교가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상태” (자유의지로서의 자유) 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존재가 해방된 상태”,  존재론적 자유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보세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 8:36)

 

이 자유는 조건이나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 자체가 변화된 상태, 즉 내면에서 발생하는 Tilværelse로서의 새 존재입니다.

 


2. 바울: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고린도후서 3:17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여기서 자유는 성령과의 인격적, 내면적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자기중심적 자율성(autonomy)**이 아니라, 타자(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개방성으로서의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 되는 것, 다시 말해 주인 없는 자유가 아니라, 참된 주인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세속적 자유의 반대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외재성을 상대화하고, 내면에서부터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자유입니다.

 


3. 예수의 침묵과 저항: 외재적 체제에 대해 조용하나 깊은 저항

예수는 정치적 해방 운동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20:26)고 말함으로써, 당대 로마적 권력구조의 근본을 해체하는 새로운 질서를 내면에서부터 제안합니다.

 

그의 자유는 “정복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기를 비우고 종이 됨으로써 타인의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입니다. (빌립보서 2장, kenosis의 논리)

 

이것은 가장 깊은 내면의 자기 비움에서 오는 존재의 해방이며, 이것이 곧 기독교적 자유의 본질입니다.

 


4. 자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세상은 자유를 “선택지의 많음”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자유를 “참된 나 자신이 되는 사건”, 즉 진리와의 일치를 통해 나타나는 Tilværelse의 생성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유는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진리 앞에 선 자로서의 책임을 짊어진 자기 자신이다.”

 

즉,

 외재적 자유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표류할 수 있지만,
 내재적 자유는 그리스도 앞에 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현실적 결단을 수반합니다.

 


5. 실존적 결론: 기독교의 자유는 내면에서 하나님과 만난 자의 형식

기독교적 자유는 세속적인 자율성의 해방이 아니라, 종속을 통한 자유, 타자(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자기,  내재적 진리로서의 존재의 형성입니다.

바꿔 말하면,

 

기독교의 자유란 그 어떤 외재적 조건 속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 그리고 그 자유로 타인의 존재를 살리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