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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데카르트와 후설의 현상학

후설(Husserl)의 에포케(ἐποχή, epoché)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철저히 의식 중심의 새로운 철학적 출발을 위한 재해석이며, 키르케고르가 비판했던 데카르트의 “죽은 의심”과는 또 다른 현상학적 태도의 전환입니다. 이제 차근차근 비교하고,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다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1. 데카르트의 판단 중지 (의심) vs 후설의 에포케

구분 데카르트 (Descartes) 후설 (Husserl)
이름 방법적 회의 (methodic doubt) 에포케 (epoché) 또는 판단 중지
목적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찾기 위해 현상 자체가 어떻게 의식에 주어지는가를 보기 위해
중단 대상 모든 기존의 지식, 감각, 세계 인식에 대한 신뢰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실재 여부’에 대한 판단 자체
핵심 태도 “나는 의심한다 →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판단을 보류한다 → 그러므로 나는 순수한 지향적 의식을 본다”
결과 코기토(cogito)로서의 자아 발견 현상에 대해 지향하는 의식(intentionality) 분석의 시작
진리 개념 존재론적 확실성 (존재하는 나) 현상에 대한 보이는 방식, 의식 안에 주어지는 의미 자체

 

 


🔁 2. 후설이 데카르트를 어떻게 계승했는가?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Cartesianische Meditationen)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현상학을 “데카르트적 철학의 철저(radikalisering)”라고 명시합니다. 즉 그는 데카르트에게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오직 자아로부터 출발하라’는 출발점을 받아들이되, 그 목적과 방향을 완전히 새롭게 전개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존재한다”로 도달했다면, 후설은 “나는 본다, 나는 의식한다”로 도달합니다.

➡️ 존재가 아니라, 의미의 의식적 구성과 지향성의 흐름이 중요해진 것이죠.

 


🙍‍♂️ 3.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볼 때, 에포케는 또 다른 ‘의심’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긴장이 발생합니다.

표면상 비슷한 점:

후설도 데카르트처럼 모든 전제에 ‘괄호’를 치고 중단합니다.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판단을 중지(epokhē)합니다. 그러나 방향성이 다르다:

• 데카르트는 의심을 통해 절대적인 인식 토대를 찾으려는 존재론적 철학자입니다.
• 후설은 의심을 통해 판단을 멈추고,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을 관찰하려는 현상학자입니다.

키르케고르의 시선에서 보면?

키르케고르는 데카르트의 방식도, 후설의 방식도 ‘신 앞에서 존재하는 실존’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

진리를 내면의 순수성, 의식의 구조 또는 자아의 확실성 안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에게서 출발하여 ‘나’ 안에서 진리를 세우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 진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는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실존의 긴장 속에서만 주어진다.”

 

따라서 후설의 에포케조차도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실존의 고통, 죽음의 불안, 죄의 심판, 그리고 신앙의 결단이라는 실존의 실체를 피해간다. 그것은 의식을 비우되, 자기를 잃지는 않는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에게는 자기를 잃어야만 참된 자아를 찾는다.

 


🔚 결론: 후설의 에포케는 데카르트의 의심인가?

질문 답변
후설의 에포케는 데카르트의 ‘의심’을 계승한 것인가? ✔️ 네, 출발점은 비슷합니다. ‘모든 전제를 중지하고, 의식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같은 의심인가? ❌ 아니요. 데카르트는 확실성을 위해 의심했고, 후설은 ‘보이기 위해’ 판단을 유보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실존 앞에서 둘은 유효한가? ❌ 키르케고르는 이성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어떤 사유도 진리의 자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키르케고르가 받아들이는 시작점은? ✔️ 감탄, 불안, 죄책, 죽음의 실존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단독자의 긴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