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27:11, Pap. X5 A 11, 1852년, 기독교적인 것의 공식
NB27:11, Pap. X5 A 11, 1852년기독교적인 것의 공식 기독교적인 것의 공식은 이렇다: 더 높은 것과의 관계가 곧 고통이 되는 방식으로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 자신보다 더 높은 어떤 것과의 관계 안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면(그것이 설령 기독교가 아닐지라도), 그는 기독교적인 것에 대한 유사성을 갖는다.물론 그것이 기독교 그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되려면, 자신이 고통받는 대상이 크리스텐덤(Χstdommen)여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공식은 성립한다: 더 높은 것과의 관계란, 고통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우연히 혹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분명히 인식하고, 그 관계란 곧 고통이라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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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7:9, Pap. X5 A 9, 1852년, 모범과 은혜, 중복
NB27:9, Pap. X5 A 9, 1852년 모범(Forbilledet) - 은혜(Naaden) 이것은 일종의 중복(Fordoblelse)이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동시에 세우신 것이다. 겉보기엔 두 요소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를 보완하고 완성한다.하나님의 생각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이제 인류는 자기 능력을 모두 다 펼쳐볼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은혜’ 덕분에 나는 내 쪽에서 인간을 최대한 격려하고, 북돋우고, 나아가게 하는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은 모범을 닮으려는 길로 나설 수 있겠지.”그런데 인간은 영리하다. 이런 중복 따위에는 끌리지 않는다. 한동안 그는 모범(Forbilledet)을 택했다. 그리고 은혜는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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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7:8, Pap. X5 A 8, 1852년
NB27:8, Pap. X5 A 8, 1852년 선포 - 선포자기 자신은 기독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선포할 수 있는가? 그래, 그런 식으로 기독교는 오직 한 번만 선포되었다.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그는 곧 기독교 그 자체였고, 그는 은혜를 획득하신 분이었다.그 외에 모든 다른 선포는 기독교를 스스로 필요로 하는 자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필요성은, 그 선포의 말 속에 반드시 섞여 들게 되어 있다.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도 기독교를 필요로 한다면, 자기 설교 속에서 “나는 은혜를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핑계 삼아 삶을 즐기고, 고통은 피하고, ㅡ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내가 세상을 구원하거나, 은혜를 획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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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7:34, Pap. X5 A 34 n.d., 1852
NB27:34, Pap. X5 A 34 n.d., 1852이기심(Egoisme)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수록,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의 본보기라고 여겨지는 것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자기 사랑(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뚜렷하게 보게 된다. 이 점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7장에서 탁월하게 밝혀낸 바 있다.[i] 즉, 무언가를 창조한 자는 그것을 더 사랑한다. 그에 비해, 창조된 것은 창조자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왜일까?그 이유는, 첫 번째 관계(창조자가 창조물을 사랑하는 것)에는 더 많은 ‘존재’(Væren), 곧 더 많은 자기애(egoisme)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자의 사랑은 가장 높은 형태의 자기중심성(egoisme)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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