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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노예를 해방하지 않았는가? 고린도전서 7장 21절 같은 구절을 통해 “왜 바울이나 예수는 노예해방을 외재적으로 직접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은 단지 역사적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실존의 내적 혁명과 외적 구조 변화 사이의 긴장을 건드리는 깊은 질문입니다. 1.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라본 이유(1) 로마 제국 하의 현실• 예수와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는 로마 제국의 노예제도가 전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통합된 구조였습니다.• 인구의 1/3이 노예였을 정도로 일상 그 자체였고, 경제, 정치, 가정의 기반이었죠.• 이 시스템에 대한 정면 도전은 즉각적이고 잔혹한 탄압과 공동체의 말살로 이어졌을 것입니다.그러므로 즉각적인 외재적 혁명을 촉구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전략적 현실 인식이 담긴 신중한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2. 예수와.. 더보기
순간의 결단은 어리석은 것, 해설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 해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결단의 순간은 어리석음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결단이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결단이 이성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실존의 도약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표현입니다. 🧩 먼저 문맥 정리: “결단의 순간(afgørelsens Øieblik) 은 어리석음이다 (Daarskab)” 왜냐하면 그 순간 안에서 인간은 ‘진리’ 앞에서 자기 존재를 걸고, 그 존재를 형성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것은 이성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키르케고르가 결단의 순간을 “어리석음”이라 부른 이유: 1. 결단은 인식이 아니라 실존의 도약이다• 소크라테스적으로 보자면, 인간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으며, 학습은 그저 이성의 인식 활동입니다.• .. 더보기
실족한 자가 자기의 본성에 따라 말하지 않는 이유 이것은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에 대한 주석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실족 개념과 요한복음 8장 44절, 그리고 거짓(løgn)과 역설(paradox) 사이의 미묘한 관계 “실족한 자는 자기 안에서 역설을 오해하여 반응한 것이지, 악마처럼 거짓을 의식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그렇다면 실족한 자는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의 영역에 속한다기보다, 진리를 무의식적으로 왜곡해서 되받아친 존재가 아닌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그렇습니다. 실족한 자는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악마”와 다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역설을 왜곡하여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적 실족의 비극성입니다. 그는 실족을 악(ondskab)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오히려 그것은진리와의 마주침에서 발.. 더보기
청각적 기만,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 해설 “청각적 기만(akustisk Bedrag)”은 Philosophiske Smuler와 관련된 문맥에서, 실족(forargelse)과 역설(paradoxet) 사이의 관계를 예리하게 드러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 질문 정리: “청각적 기만”이란 표현에서, • 역설이 기만인가?• 실족이 기만인가?• 아니면 실족이 역설을 잘못 듣는 기만인가?→ 정답은 세 번째입니다. “청각적 기만”이란, 실족한 자가 들은 것은 자기가 들은 것이 아니며, 실은 역설이 ‘자기 안에서 울려 퍼진 것’일 뿐인데, 그걸 바깥에서 들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 출처: Philosophiske Smuler (Philosophical Fragments)다음은 해당 구절의 요지:“Forargelsen … lyder anden.. 더보기
보상에 대한 기도, Paper 340:16 Paper 340:16 …그래, 물론이다.덕과 선은 그 보상을 받는다- 이것은 확실하다, 영원히 확실하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심지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이보다 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덕은 그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받는가.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보라, 덕은 그 보상을 ‘배은망덕’(ingratitude)으로 받는다. 우리가 “덕은 보상받는다”라고 말할 때 말하는 그 보상은 이것이 아니지만, 이 배은망덕은 언제나 ‘먼저’ 오는 보상이다. 덕은 그 보상을 받는다-그 보상은 ‘죽음’이다. 우리가 말하는 그 ‘참된 보상’은 이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덕의 보상이며, 그것이 ‘가.. 더보기
고통에 대한 관점, 스피노자, 프랭클, 키르케고르 스피노자의 수동적 고통(passio)과 빅터 프랭클의 의미 없는 고통,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고통 ◉ 스피노자의 수동적 고통 =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무기력스피노자에게서 passio(수동적 정념)는, “우리가 그 원인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가지지 못할 때 생기는 정서”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그만큼 우리를 휘두르는 감정이 됩니다.• 원인을 알 수 없고,  전체 체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므로→ 극복 불가능한 정념이 됩니다. 이건 바로 프랭클이 말하는, “고통이 ‘의미’를 상실했을 때, 그 고통은 파괴적인 것이 된다”는 명제와 정확히 겹치죠. ◉ 빅터 프랭클: 고통이 의미 없을 때, 그것은 인간을 무너뜨린다빅터 프랭클은.. 더보기
고통, 스피노자와 키르케고르 비교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 해설왜 키르케고르가 고통(Lidelse)을 설명하면서 스피노자와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두 철학자 사이의 진리와 정념, 능동과 수동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대조는 단순한 반박이나 논쟁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변증법 속에서 고통의 실존적 본질을 밝히려는 키르케고르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스피노자와 키르케고르: 왜 고통의 문제에서 만나는가?◉ 스피노자: 고통은 수동성(passio)이다.• 스피노자에게 정념(Affekt)은 우리가 **충분한 원인(adequate cause)**이 아닌 상태에서 외적 영향을 받아 생기는 신체적 변화입니다.  우리가 그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다면, 그 감정은 수동적인 고통.. 더보기
자기 사랑의 역설,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 주해 이 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자기 사랑(Self-love, Selvkjærligheden)의 역설적인 본질, 그리고 그것이 실족(Forargelse)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존재론적 고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세 겹의 역설 구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 자기 사랑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처음 문장에서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하죠: “og synes det ikke allerede en Modsigelse, at Kjærlighed til sig selv er Lidelse?”“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고통이라는 것은 이미 모순처럼 보이지 않는가?” 자기 사랑은 일반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것,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 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