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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27:7, Pap. X5 A 7, 1852년

by 엉클창 2025. 4. 23.

NB27:7, Pap. X5 A 7, 1852년

 

“은혜” -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aabenbare)”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말해진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전체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언제나 드러나게 한다.

어떻게? 바로 ‘은혜’가 선포됨으로써, 즉, “이것은 은혜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율법을 선포하는 자는 사람을 억지로 어떤 테두리 안에 밀어넣는다. 사람들은 적어도 율법 앞에서는 자기를 숨기려고 애라도 쓴다. 그러나 은혜, 곧 그것이 은혜라는 것, 이 말은 사람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킨다. 바로 ‘은혜 앞’에서야 비로소 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이 드러난다.

아이에게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그 아이가 그대로 행동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니다. 이렇게 말해보라:

“네 자유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러면 그 아이 안에 무엇이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비로소 보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건 은혜다”라는 말을 듣고, 기쁨과 감사 속에서, (그것이 은혜라는 사실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오래 견디며 살아낼 수도 있다. 율법 앞에서 떨며 살아가는 사람보다도.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은혜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영혼 깊은 곳에 감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누구는 모든 것을 피하고 도망친다. 계속해서 말하면서: “그래도 은혜니까.”

그렇다 해도, 당신이 모든 것을 피해 도망쳤다 해도 딱 하나만큼은 피해갈 수 없다. 그것은, 당신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율법의 엄격한 선포 뒤에는 종종 도덕적 해이(demoralisation)가 따라온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도덕적 해이는 ‘은혜’라는 이름 아래 벌어지는 해이함이다.

해설

이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율법과 은혜”라는 전통적 개념 구도를 뒤집지 않으면서도, 더 깊은 차원의 드러냄(apokalypsis)으로서 은혜의 본질을 파고든다. 은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지지만, 그 은혜 앞에서 인간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논증이 아니라, 철저히 실존적 시험의 자리다.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aabenbare)”:
이는 누가복음 2장 34-35절을 암시한다. 거기서 시메온이 아기 예수에 대해 예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넘어짐과 일어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비방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으며 (네 마음도 칼에 찔리듯 아프리라!) 이는 많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드러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은혜가 인간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주제를 말할 때, 단순히 윤리적 구조가 아니라 신학적으로는 누가복음의 시므온 예언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드러낸다”(aabenbare)는 말은, 계시(revelation)라는 신학적 함의와 더불어, 심판의 구조를 지닌다는 점에서, 키르케고르가 자주 사용하는 내면 폭로의 신적 시간과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