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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27:8, Pap. X5 A 8, 1852년

 

NB27:8, Pap. X5 A 8, 1852년

 

선포 - 선포

자기 자신은 기독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선포할 수 있는가? 그래, 그런 식으로 기독교는 오직 한 번만 선포되었다.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그는 곧 기독교 그 자체였고, 그는 은혜를 획득하신 분이었다.

그 외에 모든 다른 선포는 기독교를 스스로 필요로 하는 자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그리고 이 필요성은, 그 선포의 말 속에 반드시 섞여 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도 기독교를 필요로 한다면, 자기 설교 속에서 “나는 은혜를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핑계 삼아 삶을 즐기고, 고통은 피하고, ㅡ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을 구원하거나, 은혜를 획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나는 그저 그 은혜를 받아들일 뿐이다. 누릴 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너무도 많이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문제를 거꾸로 놓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뜻이 정말로 은혜를 통해 고통과 수고를 면제받으려는 데 있는가? 아니다. 기독교의 뜻은, 은혜를 통해 오히려 ‘율법이 가능하다면 충만하게 실현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렇게 작동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요구를 받는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영원한 구원에 있어 결정적인 것이라고 하자. 그 사람이 그것을 완전하게 실천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그의 영원한 운명이 갈린다면 -그는 그 순간 즉시 절망에 쓰러지고, 숨이 멎을 정도의 절망 속에 질식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이 요구는 너무도 두렵고 강압적이다. 그렇기에 그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말한다: 그가 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불안’ 때문이다. 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불안 때문이다. 불안을 걷어내면, 그는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드는 불안처럼, 너무 겁에 질린 아이는 그저 얼어붙는다. 더 지혜로운 교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얘가 못하는 게 아니야, 겁이 나서 그래. 이 불안을 없애주면, 얘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 적어도 꽤 많은 걸 해낼 수 있어.”

 

기독교와 은혜도 마찬가지다. 그의 구원이 걸려 있다는 불안, 그것이 그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은혜는 그 불안을 제거한다.

“너는 은혜로 구원받는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 불안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그는 해낼 수 있다. 기독교의 뜻은 다음과 같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율법 아래서조차 결코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은혜 아래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은혜를 마치 행동을 방해하는 도구처럼 만들어버렸다.

 

은혜는 본래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흐름, 용기, 추진력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의 은혜는

이상하리만치 역행하는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은혜를 핑계 삼아 점점 더 깊은 나약함, 여성적인 감상, 연약함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점점 더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늘 이렇게 거슬러 말하게 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은혜로 구원받잖아. 그렇다면 내가 왜 내 삶을 힘들게 살아야 하지? 만약 정말로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 한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 될 테고,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은혜’만 말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기독교의 뜻은 이와 정반대다. 그건 바로 이 은혜야말로 한 사람에게 용기와 열망을 불어넣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즉,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심지어는 자신이 영원한 구원을 잃게 된다 해도, 그것만은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결단 - 그것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 바로 은혜다. 그래서 우리는 더 대담하게 모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은혜로 다 구원받는 거라면, 가장 작은 모험조차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