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27:34, Pap. X5 A 34 n.d., 1852
이기심(Egoisme)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수록,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랑’의 본보기라고 여겨지는 것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자기 사랑(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뚜렷하게 보게 된다. 이 점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9권 제7장에서 탁월하게 밝혀낸 바 있다.[i] 즉, 무언가를 창조한 자는 그것을 더 사랑한다. 그에 비해, 창조된 것은 창조자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왜일까?
그 이유는, 첫 번째 관계(창조자가 창조물을 사랑하는 것)에는 더 많은 ‘존재’(Væren), 곧 더 많은 자기애(egoisme)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자의 사랑은 가장 높은 형태의 자기중심성(egoism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버지는 자녀를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도 자녀를 더 많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그 자녀의 존재(Tilværelse)에 대해 더 깊은 이기적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 다.(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순진하게 덧붙이듯,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정말 자기 아이라는 걸 더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마찬가지로,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보다 더 많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선행을 베푸는 것 자체에 자기애적 만족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장 전체는 매우 가치 있는 내용이다.
*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8권 제14장 서두 부분도 함께 보길 권한다.
[i] 키르케고르는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제9권 제7장을 Garve의 독일어 번역본(제2권, 540-545쪽; 1167b17-1168a28)에 따라 의역(parafrasere)하고 있다. 그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혜를 베푼 자는 은혜를 받은 자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경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사실이 마치 비자연적인 현상처럼 보이기에, 왜 그런지를 알고 싶어 한다. 은혜를 베푼 자와 은혜를 받은 자의 관계는 예술가와 그의 작품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누구나 자신의 작품을, 그 작품이 살아 있다면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강하게 사랑한다. 이 점은 특히 시인들이 자신의 글을 사랑하는 방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들은 그것을 ‘정신의 자식들’로 여기며, 그 가치 이상으로 높게 평가하고 애정을 쏟는다.
은혜를 베푼 자도 이와 유사한 경우에 처해 있다. 그가 베푼 은혜의 대상은 일종의 그의 작품과 같기에, 그는 그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창조자는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지만, 작품은 창조자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의 더 깊은 이유는 이렇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 ‘존재함’(Sein)은 가장 바람직하고 사랑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활동함을 통해 존재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낸 사람은 그 안에서 자기 존재를 인식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활동의 결과인 그 작품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자기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보편 법칙이다. 어떤 능력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려면 그것은 활동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고, 그 활동은 그 결과물(작품)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행위(작품)를 통해 자기 존재를 더 실감하게 되고, 그만큼 그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은혜를 베푼 자는 자신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고, 그 행위를 베푼 대상을 기쁘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자는 그 행위를 자기 자신의 도덕적 탁월함이 아니라, 그저 유익한 일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람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일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예를 들어, 스스로 노력해서 번 돈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은혜를 받는 일은 거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은혜를 베푸는 일은 어렵고 수고로운 일이다.
이와 유사한 이유로,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자녀를 더 사랑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낳기까지 더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을 더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푸는 자 역시 이와 비슷한 동기로 인해 상대에게 더 깊은 애정을 품게 된다.”
마지막에 덧붙은 Auctor는 라틴어로 창조자, 저자, 근원자를 의미하며, 이 문맥에서는 “은혜를 베푼 자”의 위치를 설명하는 개념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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