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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NB30:16, Pap. XI1 A186(1854년), 기적, 완전성 본문
NB30:16, Pap. XI1 A186(1854년)
지금 기적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요즘 기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을 하려는 시도가 기독교 세계에서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기적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그것들은 다만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과 분리할 수 없고, 따라서 주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교부들도 우롱하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사기와 똑같다.
다른 무엇보다 기적이 기독교의 초기에나 필요하고 이후에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독교가 발전되어 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 세대를 위해 시험을 만들기보다 역사를 축적했다는 의미에서 기독교가 역사적일지라도 그렇다. 그리하여 모든 각 세대는 처음부터 시작한다. 모든 각 세대는 수백만의 사람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시험을 치른다.
이것을 확고하게 붙든다면, 지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에 대한 모은 이야기가 어떻게 혼동이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신약성서에서 평이하게 언급되었던 것처럼, 기독교는 존재의 결정적 강화이다. 그 자체로 기적은 처음과 동일하게 각 세대에 필요하다.
그러나 그때 기만이 나타난다. 우리 인간은 노력을 아끼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 또한 위선적으로 이런 사실을 숨기기를 더 좋아한다.
누구도 사도가 되고 싶지 않다. 사람은 다른 사람 때문에 희생되는 것과 관련된 실제적인 고난의 개념을 갖고 있고, 누구도 그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위선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너무 겸손해서 사도가 될 수 없습니다.”
기적과 함께 동시대적으로 사는 것은 지극히 고된 일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기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의 타고난 교활함은 즉각적으로 이것을 위선적으로 숨기는 법을 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너무 겸손해서 오늘날 그런 기적은 일어나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고요.”
그래, 당연히 필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을 즐길 만한 평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직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게 금식 등과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만한 평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려한 옷을 입고 금식할 때, 그는 안전 가운데 있고 존경을 받는다. 이것은 사도가 되는 엄격함과는 다르다.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분투와 관계하는 모든 것은 언제나, 또 다시 언제나 폐지되었다. 이것을 주의하라. 위선적으로 겸손의 핑계로 폐지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우스꽝스러울지라도, 적절한 이미지를 제안한다. 기독교 세계에서 이 상황은 마치 아이들이 팽이치기 하는 것과 같다. 먼저, 팽이체로 팽이 끝부분을 몇 번 치면 팽이는 빙빙 돌면서 재주를 부린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팽이는 영리한 두 가지 발견을 생각해낸다. (이것은 이미 기독교 세계가 사용한 것들이다.)
첫 번째는 팽이가 진화해서 더 이상 팽이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성의 이름으로 기독교를 폐지했던 사기꾼의 속임수와 똑같다.) 그리하여 팽이는 자기가 선호했던 대로, 평화롭게 옆으로 누워버린다.
두 번째는 팽이가 너무 겸손해서 빙빙 돌면서 재주부리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재주는 가장 특이한 팽이를 위해 유보된다. 다시 말해, 팽이는 팽이채로 얻어맞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잘 알려진 인간적인 겸손으로 팽이는 너무 겸손해서 이런 것을 바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겸손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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