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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단독자’에 대한 헌사
특별한 때를 위한 강화에서
다음에 나오는 것이 부가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독자에게,
이 헌사를 받아주십시오. 말하자면, 이 헌사가 무턱대고 제공되었지만, 그리하여 정직하게도 다른 어떤 생각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당신이 존재하는지도, 혹은 존재했으나 더 이상 그렇지 않는지도, 당신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나의 소망, 나의 기쁨, 나의 자랑이요, 불확실성에서의 나의 영광입니다. 내가 당신을 세속적인 확실성으로 개인적으로 알았다면, 이것은 나의 수치, 나의 죄책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영광은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당신이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 위로입니다. 이 기회를 위해 내가 정직하게 일했음을 압니다. 내가 쓴 것을 읽는 것이 일반적인 실천일 수 있다면, 혹은 적어도 세상에서 앞서가기 위한 소망으로 읽은 척한다면, 이것은 나의 독자를 위한 기회의 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해가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온 힘을 다해 막지 못했더라면, 그것이 나를 속여 부정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함으로써 나는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아니, 내가 쓴 것을 읽는 것이 의심스러운 유익이라면(나에게 허락된 온 힘을 다해 이것에 헌신했다면 나는 정적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혹은 더욱이 나의 작품을 읽는 것이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것이라면, 혹은 더욱이 누구도 감히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경멸적인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나의 독자를 위한 기회의 때입니다. 그때 그는 고요를 찾을 것입니다. 그는 나를 위해, 혹은 세상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읽을 것입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읽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나의 독자입니다.
나는 가끔 목사의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한 적이 있습니다. 군중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벌 떼같이 몰려든다면, 교회의 거대한 천정이 이 많은 인파들을 수용할 수 없고,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밖에 서 있어야 한다면, 이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는 자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릴 것이고, 그의 감정은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는 군중들을 보고 영감을 받아, 영감 받은 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중이 있은 곳에 진리가 있어야 하며, 결국 그렇게도 수많은 사람이 있기에 누구나 약간의 진리는 갖고 있다는 생각에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약간의 진리를 갖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확실히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일 오후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날씨는 음산하고 쓸쓸합니다. 겨울 폭풍은 거리를 텅 비게 했습니다. 따뜻한 아파트를 갖고 있는 누구나 더 좋은 날씨가 올 때가지 하나님이 교회에서 기다리게 합니다. 아파트에는 아무런 난방기구도 없는 가난한 두 명의 여자가 텅 빈 교회에 앉아 있고 차라리 그들이 교회에서 얼어 죽는 것이 낫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그들을 따듯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종종 무덤 옆에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봅니다. 유명했고 영광스러웠던 모든 자들이 여기에 다 모였다면, 엄숙함이 전체 군중에 스며들었다면, 거기에는 이 엄숙함에 더해진 이 재능을 부여받는 자에게 대한 찬양과 영광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군중 속에 있던 해석자들이 감동받아 더해진 것이고, 슬픔의 진실을 위한 표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영구차가 있었고, 가난한 늙은 여인 외에 아무도 이 뒤를 따르는 사람이 없다면, 그녀는 죽은 자의 부인이었고, 전에는 그녀를 데려가지 않은 채 남편을 떠나가게 한 경험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요청한다면, 나의 명예를 걸고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만큼 추도사를 할 작정입니다.
나는 죽음의 결단 앞에 있는 나 자신을 상상해 봅니다. 야영지에 위험의 기운이 흐르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지 보기 위해 달려든다면, 나는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의 옛날의 공격성이 다시 한 번 깨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밖에 나가야 하고, 사람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옆으로 비켜 홀로 선다면, 나는 조용하고도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게 하나님께 소원할 것입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생의 관점이 있습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 비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생의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은밀하게, 별도로, 진리를 가졌던 모든 개인들이 군중 가운데 함께 모인다면(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군중이 결정적이고, 투표할 수 있고, 시끄럽고, 야단스러운 의의를 획득한다는 것), 비진리는 즉각적으로 거기에 현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자의 관점이 그의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나약하고 무기력한 자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의 거의 해명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비진리에 살고 있음을 믿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자신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은 괜찮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개인이 어찌 힘을 가진 군중의 반대편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스스로를 조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후자의 관점이 나약함과 무기력함의 인정이라면, 그리하여 다소 매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관점은 적어도 평등한(equable) 좋은 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군중은 개인들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러나 각각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남기 위해, 즉 개인이 되기 위해 힘을 간직해야 합니다. 누구도, 누구도, 그 어떤 사람도 다수가 됨으로써 자신을 제외시킨 사람 말고 개인이 되는 것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군중의 일부가 되는 것, 자신의 주변에 군중을 끌어 모으는 것, 이것은 차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말하면서 아무리 가장 선의의 뜻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쉽게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군중이 힘을 가질 때, 영향력, 지위와 지배를 가질 때, 이것 역시 삶에서의 차별입니다. 지배할 때, 개인을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무시하는 차별입니다. -NB:64, JP V 5948 (Pap. VII1 A 176) n.d.,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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