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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B 63:13, 1848, 순교자, 폭군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IX B 63:13, 1848, 순교자, 폭군

엉클창 2023. 8. 8. 21:00

'순교자', 이 '미래의 순교자'('단독자'라는 범주를 교육적으로 사용하는 '선교사')는 그에게서 그리고 시대('성찰의 시대')에 대한 응답으로 뛰어난 성찰과 모험 외에 믿음과 용기를 가질 것이며, 순교자가 되기 위해 또는 순교자가 되기 위해 무한한 성찰의 과제 (또는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목숨을 걸기 위해 믿음과 용기만 필요했던 이전의 (즉, 직접성의) 순교자와 다를 것이다. 이전의 모든 순교자들과는 달리, 미래의 순교자는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그를 섬길 수 있는 탁월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다. 어떤 종류의 학대와 박해를 당할 것인지, 쓰러질 것인지 아닌지, 쓰러진다면 어디에서 쓰러질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으로 올바른 지점에 쓰러질 것이다. 그의 죽음이 적재적소에 상처를 입힐 것이며, 생존자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이전처럼 순교자를 쓰러트리고, 그에게 고통을 주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고통을 결정하는 것은 '순교자'가 될 것이다. [...] 세상의 첫 번째 형태의 통치자는 '폭군'이었고, 마지막 통치자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세계의 진화에서 이것은 세속성에서 종교성까지의 운동이다.[여백에서 : 세속성이 커지는 방향으로, 세속성이 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순교자만이 통치자가 될 수있는 가장 무서운 상승에 이를 것이다. 한 사람이 폭군일 때는 대중이 완전히 세속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군중'이 폭군이 되기를 원할 때는 세속성이 완전히 보편화되어 순교자만이 통치자가 될 수 있다]

폭군과 순교자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강박(compulsion)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폭군은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무력으로 강요하지만, 순교자는 하나님께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을 통해 강요한다. 그래서 폭군이 죽으면 그의 통치는 끝나고, 순교자가 죽으면 그의 통치가 시작된다[...].
실제로 선택할 수 두 개의 당파만 있을 뿐이다.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다. 사실, 분주한 세상에는 여러 정당이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으며, 가장 놀라운 조합으로 합리적 진보, 합리적 보수에 이르기까지 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이라는 큰 나라에는 한때 네 개의 정당이 있었고 작은 오덴세도 한때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의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정당은 실제로 두 가지뿐이며, 여기에서 '개인'의 범주가 들어온다. 즉, 당신이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사람들을 거스르며 하나님 편에 서서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든가, 당신이 하나님을 속여 인간화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마16:23)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람 편에 서든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있고,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이다 - 사람되신 하나님(God-man)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들만으로도 심각성이 무엇인지, '단독자'에 대해, 악마적인 것이 무엇인지 대해, 악이든 선이든, 악에 관한 침묵과 선에 관한 침묵에 대해, '진리로 속이는 것'에 대해, 간접 소통(전달)에 대해, 이것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얼마나 큰  반역인지에 대해, 즉 하나님에 대한 모욕에 대해, 사람되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무엇이 악마적인 것인지를 배우는 것에 대해, -이것들에 대해서만  일종의 철학자인 나는 전체 책을 쓸 수 있다. 하물며 그분은 말할 것도 없다. '철학자'인 그분이 올 때 '기독교 세계에 파송된 선교사'를 볼 것이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알 것이며, 내가 겨우 조금씩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을 전부 알게 될 것이다. 48 IX B 6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