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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 28:5(1853), Pap.X5A94
금욕주의에 대하여
금욕주의는 너무 쉽게 궤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듯, 그가 더럽혀진 것이 아닐지라도, 약간은 즐거움에 빠져 살았던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때 그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해보라. 그가 과연 중단할 수 있는가? 아니다. 곧, 동일하게 불타오르는 불안이 가장 시시한 것들을 향에 일어날 것이다. 다른 빵조각을 감히 먹을 수 있는 것인지, 약간 쉰내가 나는 빵으로라도 감히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인지 등.
이런 식으로 금욕주의는 쉽게 사람을 교만하게 하거나 미치도록 이끌 수 있다.
어쨌든, 금욕주의가 실제로 실천되고 있는 동안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을 도왔던 것은 그들이 그 방향에서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실제로 믿었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기에 놓여 있는 무제한성에 대한 더 발전된 지적 이해를 갖지 못했다.
이 짧은 일기에서 키르케고르가 금욕(Askese)에 대해 남긴 사유는 단순히 수도사적 삶을 풍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금욕이라는 의지적 수련의 형태마저 실존적으로 깊이 파고들고 있어요. 이 일기의 의도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핵심 맥락을 짚어야 합니다.
🔍 1. 금욕이 곧바로 참된 실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키르케고르는 금욕을 단순히 쾌락의 부정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근심의 열정(Bekymrings Lidenskab)’—즉, 자기 자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문제 삼습니다. 그 사람은 사치와 쾌락을 끊었지만, 그 끊은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사로잡혀 있어요.
“내가 이만큼 덜 먹어도 될까?, 배부르게 먹는 게 죄일까?”
이런 질문에 빠져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자신의 구원과 자기 완성을 위해 스스로를 통제하는 데 집착하고 있고, 그 자체가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의 다른 형태라는 것이죠.
🔍 2. 금욕은 쉽게 ‘교만’이나 ‘광기’로 변질된다
그가 말하듯,
“Askese saaledes kan saa saare let føre et Msk. enten til Hovmod eller til Vanvid.”
이는 키르케고르가 실존적 자기반성 없이 수행되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노력 전체를 향해 던지는 비판이에요. 즉, 종교적 행위조차도 참된 ‘자기’ 앞에 서는 것을 회피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계속 지적합니다.
교만(Hovmod)은 자신이 수행해낸 금욕을 자랑으로 삼는 것이고, 광기(Vanvid)는 그 수행의 끝없는 반복 속에서 무한한 자기 분석에 빠져 망가지는 것이죠.
🔍 3. 현대인의 지성은 ‘무한성’의 개념을 인식한다
키르케고르는 금욕이 과거에는 효과를 가졌던 이유로 이렇게 말합니다:
“…de virkeligen troede, at der i denne Retning lod sig naae en Grændse…”
과거에는, 사람들은 금욕이라는 길에 어딘가 끝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덜 병들 수 있었어요. 그러나 현대인은, 특히 ‘더 발달한 지성’(mere udviklet Intellectualitet)을 가진 사람은 그런 절대적 경계가 없다는 것, 즉 무한성을 알아차립니다. 그 순간, 그는 절제의 끝도 쾌락의 끝도 알 수 없게 되고, 끝없는 자기해석과 자기억제로 들어가 버리게 되죠.
🎯 요약: 이 일기의 의도는?
실존적 자기 자신 앞에 서지 못한 금욕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이 단순한 도덕적 훈련이나 금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리 앞에 놓는 실존적 결단이라고 믿었어요. 이 일기는 그런 그의 신앙적 실존 이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비판적 고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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