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Tags
- 영원한 행복
- 반틸
- 절망
- 카리스 아카데미
- 도예베르트
- 내면의 감금
- 말씀의 거울
- 능력의 말씀
- 계시
- 콩깍지가씐사랑 #카리스아카데미 #복수 #사랑 #허다한죄
- 현상학
- 믿음
- 라이프니츠
- 죽음에 이르는 병
- 헤겔
- 문화 개신교
- 변증학
- 반토대주의
- 카리스아카데미
- 키르케고르
- 말씀은 거울이다
- 미학
-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 시인의 실존
- 칼 바르트
- 계시현상학
- 말씀
- 후기 토대주의
- 토대주의
- 자유주의
Archives
- Today
- Total
프라우스
본받음에 대하여(NB 20:23, Pap. X3 A 276) 본문
NB 20:23
유대교와 기독교의 혼합 기독교 세계에서 보는 종교성의 부스러기(그리고 이것은 많지 않다.)는, 내가 다른 곳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적인 것과 유대교적인 것의 혼란스러운 혼합물이다. 여기에 우리가 사는 방식이 있다: 어떤 신이, 하늘에 어떤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만 수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방식을 아실 뿐이다. 나느 그렇게 추측한다.) 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세상에서 일이 잘되든 못되든 그분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경건한 자의 자리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다. 때로는 경건한 자가 평온하게 살고, 행운이 그에게 미소지을 수도 있는 반면, 다른 경건한 자는 불행에 직면한다. 하지만 둘은 경건하다. 그들이 경건한지 경건하지 않는지는 그들의 운명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판에 율법을 쓰셨다.* 또한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율법이 계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결코 스스로를 모범으로 제시한 적이 없다. 이것이 사람들이 지금 지지하는 종교성의 종류이다. 그때 그들은 은혜로, 경감시키는 요소로,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또한 모범(Forbilledet)이시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관계하는 모든 순간, 나는 본받음에 헌신한다. 이것이 완전히 제거되었다. 혹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의미하는 바인가? 즉, 그분이 고난당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은혜를 일으키신다. 그때 나는 그분의 길을 선택하는가, 나의 길을 가는가? 본보기가 있자마자, 본받음에 대한 의무가 존재한다. 본받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나의 삶이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 노력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시 본보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경건하게 되는 것과 경건한 자에게 들이닥치는 일 사이에 필연적 관계를 정립한다. 명확한 방법으로 흔적이 남겨 있지 않은 이 경건한 자는 결코 경건한 자가 아니다. 지금 시도하라. 나는 평안한 삶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경건 사이에 어떤 필연적 관계도 정립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본보기가 표현하는 것은 경건은 이 세상에서 고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쉬운 삶을 간정할 수 있는가? 내가 묻고 잇는 분이 그리스도일 때, 이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주님이 명확하게 요구하셨던 본받음에서 내가 면제되기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 마치 주문을 외듯, 은혜의 도움으로 쉬운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직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기독교에 대해 놀라운 일은 다가오는 고난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관계함으로, 고난은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올바르게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을 면제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만큼 놀랍게 동시대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제시할 수 없다. 그들은 고난과 기독교의 필연적 관계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고난이 닥칠 때까지 정반대를 소망했다. 그분의 동시대 사람들도 동일한 의미에서 본보기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분과 동시대에 있다는 것은 본보기가 발전시켰던 동안의 시간이고, 따라서 그분의 죽음으로 끝난 발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은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은혜는 고난과 본보기의 죽음을 통해서만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는 내가 고난에서 면제되는 의미에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은혜란 내가 부드럽게 다루어지는 것이고, 고난을 통해 스스로 복을 얻을지라도, 공로의 불안에서 내가 해방되는 것이다. |
Pap.X3A277 [a] 그리고 고난은 반드시 닥친다. 본받는 자가 질적으로 적합한 표시로 이 세상에서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행위를 하는 순간, 그는 세상과, 기독교 세계와 충돌한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행위는 공격을 가하는 초과(quid nimis)의 표시를 갖는다. 당신이 100만을 소유했고, 이 중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100,00rd를 나누어 준다면, 크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주라. 그러면 당신은 충돌할 것이다.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 가능하면 큰 생계수단을 갖고, 존경받을 만한 지위를 얻으라. 그때 당신은 대성공을 할 것이다. 그때,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당신이 얻은 모든 유익을 포기하라. 그러면 당신은 충돌할 것이다. |
* 로마서 2:14-15를 참고하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덴마크어
Pap.X3A276Sammenblanding af Jødedom og Χstd.
Den Smule Religieusitet man seer |31 i *Christenheden (og *det er da Lidt nok) er *som jeg andetsteds har bemærket, egl. Jødedom,] med] en forvirrende Tilsætning af noget Χstligt.
|23, 404Man lever saaledes. Man troer (kun Gud veed forresten hvor mange der gjøre] det, men *eh bien, det antager jeg) at der er en Gud til, en Fader i Himlene. *Denne Gud styrer Alt, i hans Haand ligger det, om det skal gaae mig vel eller ilde i Verden, om jeg skal have Medgang eller Modgang o: D:. Dette vil sige, her er Intet afgjort, hvilket den Frommes Lod er i Verden, stundom lever en From i gode Dage og Medgang smiler til ham, medens en anden From har idel Modgang og dog ere de begge Fromme, man] kan af deres Livs Skjebne Intet bevise, om de ere Fromme eller ikke. – *Denne Gud har skrevet sin Lov i Mskets Hjerte, ogsaa paa anden Maade lade[t] ham den vorde aabenbar. Men denne] Gud har aldrig fremstillet sig selv som Forbillede.
Denne Art Religieusitet beholder man nu, og saa anbringer] man *Χstus som det blot Beroligende, som Naaden.
Men Χstus er tillige Forbilledet. Idet jeg da forholder mig til Χstus, og i ethvert Øieblik jeg forholder mig til Χstus forpligter jeg mig til Efterfølgelse. Dette har man |[32] reent afskaffet. Eller er dette at følge Χstum efter, at lade ham saa at sige gaae sin Gang i Lidelse – derved] erhverver han Naaden – den tager saa jeg, og gaaer saa min Gang.
Saasnart der er et Forbillede, saa forpligter det til Efterfølgelse. Hvad vil saa] Efterfølgelse sige? Det vil sige en Stræben efter mit Livs *Conformitet med Forbilledet.
Men det at der er et Forbillede, sætter saa igjen et nødvendigt Forhold mellem det at være den Fromme og hvad der vederfares den Fromme. Den Fromme, der ikke er mærket paa en ganske bestemt Maade, han er eo ipso ikke den Fromme.
Forsøg det nu. Jeg kan bede til Gud om gode Dage; thi Gud har ikke sat et nødvendigt Forhold mellem Fromhed og det at lide i denne] Verden. |33 Forbilledet derimod udtrykker, at Fromhed er at lide i denne Verden. Kan jeg nu bede til Χstus om gode Dage. Umuligt; thi idet jeg beder Χstus] derom, siger jeg indirecte, at jeg beder ham at hjælpe mig til at fritages for Efter|23, 405følgelsen, hvilken han just fordrer. Og dog bruger man i Χstheden netop Χsti Navns Paakaldelse for ret at *betrygge, at jeg skal have gode Dage ved Hjælp af – Naaden.
Det Forfærdende ved Χstd. er endda ikke Lidelsen, som kommer, men det at jeg maa forstaae, at ved at indlade mig med Χstus maa der komme Lidelse. Saa jeg vel kan bede ham at hjælpe mig at holde ud, men ikke at fritages, da det er at spotte ham.
Saa forfærdende kunde Χstd. end ikke stille sig for de samtidige] Disciple; thi de saae ingen Nødvendighed mellem Lidelse og Χstd, tværtimod de haabede lige det Modsatte, indtil saa] |[34] Lidelsen kom. Men saa havde de samtidige heller ikke ganske i samme Forstand Forbilledet (thi Samtidigheden med ham var jo den Tid, i hvilken Forbilledet udfoldede sig, som altsaa først endes med hans Død) ei heller havde de »Naaden«, hvilken erhvervedes ved Forbilledets Lidelse og Død. Kun at Naaden ikke skal forstaaes i Forhold til at jeg faaer Lov til at slippe for Lidelse, men til at der tages lempeligt paa mig, og at jeg fritages fra *det Fortjenstliges Angest, som skulde jeg selv ved Lidelse erhverve Saligheden.
]
#
|
[a] Pap.X3A277Og Lidelsen vil ogsaa nok komme. Thi i samme Øieblik en Efterfølger sætter en qvalitativt rigtigt mærket væsentlig christelig Handling ind i Verden, saa vil han ogsaa collidere med Verden, med Χstheden. Enhver væsentlig christelig Handling er mærket af det *quid nimis, der *er til Forargelse. Giv, hvis Du eier en Million, *100,000rd til de Fattige, og Du vil gjøre Lykke: *giv det Alt og Du vil collidere. Tag et stort Levebrød en hæderlig Embedsstilling for at forkynde Χstd, og Du vil maaskee gjøre Lykke; forsag Alt, al Din] egen Fordeel for at forkynde Χstd,: og Du vil collidere.
|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NB 28:5(1853), Pap.X5A94 (0) | 2022.06.23 |
---|---|
Journal NB 28(1853년)은 여기에서 시작하십시오 (0) | 2022.06.23 |
기독교의 아이러니, 사람이 된다는 것, 이상성(NB 35:2, Pap. XI2 A 189) (0) | 2022.05.12 |
은혜와 노력(Pap. X3 A 734) (0) | 2022.05.11 |
하나님 앞에서 무(Pap. X2 A 76) (0) | 2022.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