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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 28:6, Pap.X5A95

엉클창 2022. 6. 2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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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업데이트 될 예정입니다. 덴마크어 원전과 영어를 참고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저널 표기법은 NB와 Pap를 병행하여 표기했습니다. JOURNAL NB28 Journal NB28 in Søren Kierkegaards Skrifter P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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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 28:6, Pap.X5A95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

유대인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죽음이라고 믿었다. 이방인들은 신을 보는 것은 미쳐서 벌 받은 것이라고 믿었다. , 하나님을 보는 것이 벌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숭고한 은혜이고, 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그 자체로 성화되어야 한다. 내가 종종 관계했던 것처럼,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가장 큰 인간적 고난과 초인간적 복)의 일사병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못한다. 그분의 뜻은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선포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나(이 구체적인 ’)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이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너는 그렇게 해야 한다.”

아니, 모든 개인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명령을 구체적으로 번역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방법들 중에서도, 이해(understanding)의 도움으로 일어난다.

그리하여, 모든 일반적인 사람(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승인 되었던 자들은 이 관계에서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은 자신의 이해의 사용뿐 아니라 사용했던 방법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도 그의 이해를 사용해야 하는가? 확실히 그렇다. 사람이 이해한 방식으로 모험하기 원하는 것, 그것은 어떤 재앙이고, 스스로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자는 스스로를 하나님께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식으로 그의 이해를 사용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해와 비겁을 사용하는 바, 세속성의 전체를 갖는 것 아닌가?

후자와 관한 한, 아니다. 사람이 어떤 재앙(Undergang, 운명)으로 모험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험하는 것에서 면제되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니, 모험할 때, 재앙이 가능할 수 있다. 이것을 모험이라 부른다.

전자에 관한 한, 기독교는 물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이기적으로 자신의 이해를 사용하게 될 위험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사람의 태도로 모험하는 것,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행할 수 없고, 감히 모험할 수도 없고, 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자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되고,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명령이 파멸로 뛰어드는 것이더라도, 그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한편, 모든 일반적인 사람이 어떤 파멸에 뛰어들지 말아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파멸이 있고, 어디에 파멸이 없는지를 결정하기란 사실 힘들 수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모험을 해야 하고, 심지어는 자기를 미워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거대한 어려움이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매 순간마다 그가 은혜가 필요한 자임을 가르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때로는 자기를 아끼고, 이해를 활용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직접 하나님께 이것을 보고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그리스도는 부자 청년에게 말한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라.”

이 청년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면, 그래, 이 경우 그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이 구체적인 사람으로 그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는다. 구체적 명령이다. 이 젊은 청년이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면, 그는 본질적으로 이 이야기를 읽은 모든 후대의 부자 청년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스도는 물론 그에게 직접적으로 너는 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직접적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일을 쉽게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책임에서 면제된다. 그러나 아, 이 명령은 고난당해야 하고,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고난에서 면제된다. 어쨌든, 그 정도의 고난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이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하는 고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