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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원죄적 죄책(Arveskyld)과 원죄(Arvesynd)

 

원죄적 죄책(Arveskyld)과 원죄(Arvesynd)은 서로 밀접한 개념이지만 차이가 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방식과 기독교 신학에서의 전통적인 개념을 함께 살펴보자.

1. 원죄(Arvesynd)란?

기독교 신학에서 원죄(原罪, Arvesynd)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교리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타락을 의미하며, 개별적인 행위 이전에 존재하는 상태다.
즉,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영향 아래 있고, 이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원죄를 “세습된 죄”로 보았고, 이는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모든 인류에게 전이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성경에서는 로마서 5:12 에서 이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 즉, 원죄(Arvesynd)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개념으로, 개인의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 상태를 뜻한다.

 

2.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원죄(Arvesynd)와 관련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Arveskyld는 단순히 원죄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죄책감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개념이다.
즉, 원죄(Arvesynd)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의 영향 아래 있다”는 객관적 조건이지만,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이 죄책을 자각하는 순간 발생하는 내면적 경험”이다.

①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윤리적·미학적 양면성을 지닌다.

고대 비극에서 원죄적 죄책은 “죄책이면서도 죄책이 아닌 것”이라는 역설적 상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를 보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죄를 지었지만, 본인의 의도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죄책을 지니지만, 동시에 죄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모순적인 상태에 있다. 이것이 원죄적 죄책(Arveskyld)의 특징이다.

②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실체적(substantiel) 성격을 가진다.

키르케고르는 원죄적 죄책이 단순한 개인적 죄책감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구조 자체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요소라고 본다. 즉, 이 죄책은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일부로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원죄적 죄책이 “슬픔(Sorg)“을 깊게 만든다.

👉 즉,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의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적 갈등이며, 이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에서 비롯된다.

 

3. 원죄(Arvesynd)와 원죄적 죄책(Arveskyld)의 핵심 차이

개념 원죄(Arvesynd) 원죄적 죄책(Arveskyld)
정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태어난 상태 인간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적 죄책감
주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날 때부터 존재 인간이 자신의 죄를 자각할 때 발생
형이상학적/윤리적 형이상학적(Metaphysical) 상태 윤리적(Ethical) · 미학적(Aesthetic) 상태
비극적 의미 인간 존재 자체가 죄의 영향을 받음 인간이 스스로 죄책을 짊어지지만, 죄책이면서도 죄책이 아닌 모순적인 상태
예시 “모든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기독교 교리) 오이디푸스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국 죄를 짓게 되었다.

👉 원죄(Arvesynd)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본질적 상태이며,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인간이 이 상태를 자각할 때 경험하는 죄책감과 실존적 갈등을 의미한다.

 

4. 왜 원죄적 죄책(Arveskyld)이 비극에서 중요한가?

키르케고르는 원죄적 죄책이 고대 비극의 핵심 요소라고 본다.

1. 고대 비극에서 주인공은 죄를 지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신탁대로 이루어졌다.
그는 죄책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이 죄를 지었는지조차 모호하다.
이 모순이 비극적 슬픔을 깊게 만든다.

2. 기독교에서는 원죄적 죄책이 신 앞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조건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아도, 이미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즉, 인간 존재 자체가 죄책감을 동반하며, 이는 신 앞에서의 근본적인 실존적 문제로 작용한다.
바울이 말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라는 구절도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반영한다.

3. 이 원죄적 죄책은 비극과 기독교적 신앙의 차이를 보여준다.

고대 비극에서는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죄책을 자각하고 몰락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적 죄책을 자각할 때,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Redemption)을 경험할 가능성이 열린다.
즉, 비극은 원죄적 죄책을 통해 몰락으로 가지만, 기독교는 이 죄책을 신앙을 통해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원죄적 죄책(Arveskyld)이 단순한 윤리적 책임이 아니라, 비극적 슬픔과 인간 실존의 본질적 조건을 드러내는 핵심 요소라고 본다.

 

결론

1. 원죄(Arvesynd)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는 타락한 상태이며, 개인의 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기독교 신학적 개념이다.
2. 원죄적 죄책(Arveskyld)인간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적 죄책감이며, 이는 윤리적 · 미학적 갈등을 포함하는 실존적 개념이다.
3. 비극에서는 원죄적 죄책이 “죄책이지만 죄책이 아닌 것”이라는 모순으로 나타나며, 이 모순이 비극적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든다.
4. 기독교 신앙에서는 원죄적 죄책이 인간의 근본적 조건이지만, 구속(Redemption)을 통해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열린다.

👉 결론적으로, 원죄(Arvesynd)는 존재론적 상태이며, 원죄적 죄책(Arveskyld)은 이를 자각할 때 발생하는 실존적 문제이다.
👉 비극에서는 원죄적 죄책이 절망을 낳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를 신앙을 통해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에서는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키르케고르가 원죄(Arvesynd)와 죄책(Skyld)의 관계를 논의하는 방식에서,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라는 개념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 『불안의 개념』에서 원죄(Arvesynd)와 죄책(Skyld)의 관계

『불안의 개념』에서 키르케고르는 원죄(Arvesynd)를 단순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실존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원죄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현재적 순간에서도 동일하게 경험하는 실존적 조건이라고 본다.

즉, 원죄는 단순한 “과거의 유전적 죄”가 아니라, “각 개인이 존재 속에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실존적 조건”이다. 이것이 『불안의 개념』에서 제시되는 핵심이다.

👉 그러므로 키르케고르는 원죄를 하나의 “죄책(Skyld)“과 연결하여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윤리적 “죄책”이 아니라, “불안(Angest)을 통해 자각되는 죄책감”을 강조한다.

 

2. 원죄적 죄책(Arveskyld) 개념이 『불안의 개념』에 내포된 방식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개념이 『불안의 개념』 속에서 내재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 키르케고르는 원죄를 “불안(Angest)“과 연결한다.

원죄는 불안을 동반한다.
인간이 원죄를 경험하는 방식은 불안을 통해서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죄의 가능성(possibility)을 인식하는 상태이다.
아담의 원죄도 불안으로부터 출발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창 2:17)는 명령이 주어졌을 때, 아담에게는 아직 죄의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금지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순수한 가능성으로서의 불안(Angestens mulighed)”이라고 부른다.
결국 아담이 죄를 범한 것은, 불안이 그를 죄의 가능성 속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 즉, 인간은 먼저 불안을 경험하고, 그 후에야 자신이 죄책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 이것이 바로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라는 개념이 『불안의 개념』에서 암묵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② 죄는 단순한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키르케고르는 원죄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아담의 원죄”는 단순히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상태이다.
모든 인간은 불안을 통해 원죄적 상태를 체험하며, 자신이 죄를 짓기 전부터 이미 죄의 가능성 속에 놓여 있다.

👉 따라서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도 이미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적 원죄 경험”이며, 바로 이것이 “원죄적 죄책(Arveskyld)“이 내포된 방식이다.

 

3. 『불안의 개념』과 원죄적 죄책(Arveskyld)의 관계를 정리하면

1. “원죄적 죄책(Arveskyld)“이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개념은 『불안의 개념』 속에서 내포되어 있다.
2. 키르케고르는 원죄(Arvesynd)를 “불안(Angest)“과 연결하며, 불안이 인간을 죄의 가능성 속으로 이끄는 실존적 조건이라고 본다.
3.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도 이미 죄의 가능성 속에 있으며, 그 가능성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실존적 죄책감”을 경험한다.
4. 이러한 실존적 죄책감이 바로 원죄적 죄책(Arveskyld)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 즉, 『불안의 개념』에서 키르케고르는 원죄적 죄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그 개념을 불안(Angest)의 개념 안에서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