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언어는 존재의 집(Das Wesen der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이라는 개념과, 탈레랑 및 영(Young)의 “언어는 사고를 감추는 도구”**라는 개념은 일종의 정반대 관계에 놓일 수 있다.
1. 하이데거(Heidegger)의 언어관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장(場)이다. 즉, 존재(Sein)는 언어를 통해 열린다, 그리고 언어 속에서 인간은 존재와 관계 맺는다.
• 언어는 우리가 세상과 접촉하는 근원적인 방식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경험한다.
2. 탈레랑과 영(Young)의 언어관
• 언어는 본래 사고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고를 감추는 수단이 된다. 즉, 언어는 존재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장(déguiser, skjule)하고 감춘다.
•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종종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키르케고르의 입장은 어디에 속할까?
키르케고르의 논의를 보면, 그는 탈레랑과 Young의 입장과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 키르케고르는 “일상의 수다(Passiaren)는 언어를 사고의 도구가 아니라, 사고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시킨다”고 지적한다. 즉, 보통의 사람들은 언어를 사용하여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 자체가 없음을 감추는 데 사용한다.
• 따라서 일상 언어는 존재를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키르케고르도 존재의 진정한 언어, 즉 “신 앞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언어”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언어관과도 접점을 가질 수도 있다. 결국, 일상적 언어(Passiaren의 언어)는 사고를 감추지만, 실존적 언어(신 앞에서의 언어)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키르케고르는 탈레랑/영의 언어관과 하이데거의 언어관 사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 > 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죄적 죄책(Arveskyld)과 원죄(Arvesynd) (0) | 2025.02.16 |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0) | 2025.02.15 |
슬픔은 고통보다 더 실체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0) | 2025.02.15 |
이것이냐 저것이냐 텐마크어 원문 143 (0) | 2025.02.15 |
레싱의 비극의 개념 (0) | 2025.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