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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70, (Pap.VII1 A182) n.d., 1846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70, (Pap.VII1 A182) n.d., 1846

엉클창 2022. 7. 25.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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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70, Pap.VII1 A182, 1846년

최고 높은 수준의 직접성 혹은 감정의 변증법 - 자연과학과 비교하여

내가 사랑에 빠진 소녀와 이 열정을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이해와 지식을 이용하기 원하는 남자를 상상한다면, 그녀의 보물을 지키는 것과 조롱당하는 것 사이에서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선택에 대한 문제란 있을 수 없다. 아니, 그러나 젊은 소녀에게 침착하게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할 거야.”라고 말하는 극도로 냉정하고 침착한 남자가 있다면, 젊은 소녀가 그가 설명했던 모든 것이 완전히 옳았다고 인정한다면, 그녀는 실제로 그녀의 보물에 대해 그의 빈곤한 상식을 선택하기를 원할까? 혹은 오히려 젊은 소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

“당신이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나 역시 잘 이해할 수 있지요.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렇게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군요. 이것은 나를 그렇게도 깊이 사로잡고 있었던 것인데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동일한 것이 아님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다른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이해가 스스로를 열정과 관계한 방식에 반대하여 대답한 젊은 소녀의 답변에 경의를 표한다.(그녀가 이것을 말할 때, 이 말은 감동적이고, 현명한 남자가 말할 때는 아이러니하다.) 소위 이해(계몽, 사변 등)가 믿음과 직접성 대신에 참람한 것을 정립할 때, 이해를 선택함으로써 절대적으로 상실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해가 이런 동일한 것을 제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일 때, 변화된 형태임에도, 그것은 상당한 상실이다. 여기에서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이해로 스스로를 냉랭하게 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고, 열정, 믿음, 확신에 남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과학이 이해를 위한 열망으로, 자연과학의 숭배자들과 지지자들을 더욱 열정적으로 만드는 한, 어려움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정도로 이해와 열정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변 사상가 혹은 자연 과학자들은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열정적인 바, 그는 끊임없이 자기가 철폐하려는 것을 정립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는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열정적이지만, 스스로 열정적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이 열정에서 그가 다른 모든 것을 개념화하는 데 열정적일지라도, 자신의 열정을 개념화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둘 중에 하나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개념화하는 자가 냉랭해졌다는 것, 그러나 저 경우, 그가 사실인 것을 개념화할지라도, 그이 모든 개념화는 열정과 비교할 때, 상실이든가, 혹은 그는 개념화하는 그의 노력에서 열정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 경우, 그를 지지하는 최종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열정을 정립한다.

우리 시대에, 특별히 위험한 것은 자연과학이다. 생리학은 궁극적으로 너무 팽창하여 윤리학을 흡수할 것이다. 윤리학을 물리학으로 다루는 새로운 시도의 흔적이 이미 보인다. 이에 따라 윤리학 전체는 착각이 되고, 인류의 윤리적 측면은 통계학적으로, 평균 숫자의 문제로 다루어질 것이다. 혹은 자연법칙에서 진동을 계산하는 것처럼 계산될 것이다. 

생리학자는 스스로에게 전체 인간을 설명하는 과제를 부과해야 한다. 여기에서 이것은 무엇보다도 principiis obsta(시작에 저항하라!)의 문제이다. 나는 이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내가 왜 혈액의 순환과 자궁에 있는 인간의 미세한 상태에 대해, 신경자극과 다른 신경 자극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윤리적은 것은 나를 위해 충분한 과제를 갖고 있다. 혹은 먹을 수 있기 위해 소화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내가 알 필요가 있을까? 혹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신경계의 과정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그때 누군가 “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나는 차례로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자연의 관찰자가 되는 것은 나의 윤리적 열정 전체를 약화시키지 않을 것인가? 유비들, 기형들,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한 이 모든 다양한 지식을 가짐으로써, 나는 “너는 해야 한다. 바로 너이다.”라는 윤리적인 것에 대한 인상을 점점 더 상실하지 않는가?

당신은 단 하나의 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하늘과 땅이 “너는 해야 한다.”라는 것을 붕괴시킨다 해도 말이다. 이것이 나에게 수많은 그늘을 드리우는 회피와 변명을 제공하지 않는가? 내가 생리학 전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라’이라고 말하는 대신, 나에게 생리학으로 시작하라고 허용된다면, 나의 관심은 가장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지 않을까?

나는 탁월한 생리학자를 상상한다. 칼의 도움으로, 그때 현미경의 도움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단순 무식한 정육점 소년들은 나에게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하는가? 무엇보다 그는 모든 이행이 도약이라고 인정한다. 의식이 어떻게 존재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혹은 주변 환경에 대한 의식이 어떻게 자기의식이 되는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신경계를 많이 설명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즉, 그는 이념(idea)를 설명할 수 없다.

탁월한 생리학자는 동물과 인간 사이의 어떤 유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한다. 요약해서, 그는 질적 변증법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는 명확하게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하는가? 칼로 그가 할 수 있는 한, 해골로 만들고, 해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한다.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할 수 없다! 모든 꽃잎을 따고, 줄기를 절개하고, 현미경 밑에 모든 부위를 본다 해도, 그 식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면, 그는 그것을 왜 하는가? 혹은 그는 배우는 자를 일종의 잘못된 자기모순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신, 그는 배우는 자에게 무지막지하게 세부적인 것으로 무거운 짐을 지운다. 극도로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지식의 무거운 짐을 지운다. 하지만 이런 지식은 언제나 궁극적인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명확히 이것이 사실이다. 그렇게도 많은 지식으로 계속해서 어지러워지는 것, 이것은 진정한 윤리적 표현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는다. 베고파서 먹기를 시작하기보다, 가볍게 무장하고 열정적으로 윤리적인 것을 시작하기보다, 신경계, 신경절 계통, 혈액 순환에 대한 어떤 지식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있기보다, 소화에 대한 지식으로 무거운 짐을 진다. 이 모든 분석에도 불구하고, 최종 분석에서 궁극적인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든 이 표면성 지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자유와 필연의 문제를 가져와 보자. 그때 생리학자가 혈액 순환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저런 것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신경의 압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모든 설명을 시작하게 해보자. 하지만 결국 그는 자유가 착각이라고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숫자들과 변칙들이 가득 찬 네 권의 2절판의 대형 책을 썼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놀라서 멈춥니다.”

그때, 이 모든 지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을 바보로 놀리는 것 아닌가? 그것은 그를 열정으로 조금씩 속여 착각의 진흙탕에 빠지게 한 다음, 어느 날 훨씬 더 큰 현미경의 도움으로 자유는 착각이고, 전체는 자연적 과정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아닐까? 

모든 지식은 무언가 사로잡는 것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지식인의 마음 전체 상태를 바꾼다. 생리학자들이 맥박을 재고 신경을 연구했던 이 객관성, 사심 없는 마음은 윤리적 열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때, 생리학자가 가장 놀라운 관찰로 가득 찬 극도로 주목할 만한 2절판의 대형 책 네 권을 썼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것, 윤리의 시작과 끝인 궁극적인 것은 설명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그가 정직하고 탁월하다면.) 그때 독자들이 전체 4권의 책을 읽고 생리학자에게 감탄했을 때, 그의 기분은 조금씩 바뀌었다. 따라서 윤리학자는 은밀하고 반계몽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만 윤리적인 것은 지식의 적이다. 그것은 전체 인생에서 사람을 사로잡은 다음, 결국 지식은 가장 중요한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난다.  

여태껏 살았던 최악의 범죄자를 상상해보자. 그리고 그 때쯤이면 생리학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멋진 안경을 코앞에 두게 될 것을 상상해보자. 그래서 그 범인을 설명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자연적 필연의 문제이며, 그의 뇌가 너무 작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그에게 내리는 판결과 비교해 볼 때 기소 면책특권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 인간의 생리학에서 자연의 독창성에 대한 과학적 감탄은 전적으로 이질적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것과 관련하여서는 이단이다. 윤리적인 것은 감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다만 “너는 해야 한다.”는 이것만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