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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인물

바르트와 반틸 비교

엉클창 2022. 5. 29. 15:54

 

반틸의 형이상학적 존재이해

반틸은 과거지향적 전통의 형이상학의 영역에 남아 있다. 그는 철저하게 절대적 자명성과 확실성을 형이상학적 가치로 확인하고, 그러한 존재 영역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기독교 계시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신학을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에 기초한 논리적 반성의 결과로서 받아들이도록 한다. 즉, 이 자연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구성한 형이상학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선택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더 현실적인 것인지를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판넨베르크는 하이데거류의 존재이해보다 형이상학적 언어가 더 신앙적 표상을 나타내는 데에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한다.

반틸의 이해에서, 계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자기 증명이고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우리 속에서도 절대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만 제대로 이해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서 반틸은 구체적인 보편이며 영원한 존재로서 시간의 유한성을 넘어서 모든 만물의 통일적 조화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성격을 들고 있다.(The defense of the Faith, 42쪽 이하 참고)

그렇다면, 이런 자연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점은 성서와 연관해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유한한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반틸은 이 두 문제의 선후관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성서의 계시적 현실을 먼저 이해하고 그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성과 확실성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이해하려하지 않고, 철학적 전제들을 미리 전제로서 규정하고 그것을 다시 성서의 무오류라는 형이상학적 전제하에서 상호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실제로는 성서보다 형이상학적 철학의 확신을 우선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성서의 계시가 그것 안을부터 절대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우리의 영역 속으로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외부의 형이상학적 무오류라는 권위에 의하여 받아들이도록 강요되는 것이다. 성서의 증언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으로부터, 추측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으로부터, 선험적인 이유로부터, 그 내용적 절대성이 우리에게 수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논지를 펼친다.

즉, 우리는 추상적으로 선험적으로 절대성의 범주를 계시의 현실과 말씀의 현실이 드러날 수 있는 지평으로서 이미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반틸 안에 있는 또 다른 측면, 즉 보다 더 역동적인 성서의 계시 현상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