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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31:126, Pap. XI1 A 462, 순교, 존재, 아르키메데스

엉클창 2025. 1. 17. 11:18

 

NB31:126, Pap. XI1 A 462

순교(Martyriet)

신약성경에서의 기독교(Χstd)는 순교(Martyriet)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Forbilledet)의 모범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기독교는 가장 깊은 근원에서부터 존재(Tilværelsen)를 움직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가 말했듯이, 반드시 바깥에 있는 점(Punktet udenfor)이 필요하다.[i]

이 바깥의 점은 오직 순교(Martyriet)이며, 순교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인식을 가진 순교만이 해당한다. 순교와 수천 명의 순교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차라리 그런 고난이 필요하지 않았기를 바란다면, 그런 모든 순교는 단지 세상 안에서의 움직이는 한 점(Bevægelses-Punkter i Verden)일 뿐, 세상 밖의 점(Punktet uden for Verden)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순교는 여전히 세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실행된다. 세상의 도움, 인간적인 지혜 등이 동원되며,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순교의 길을 택하게 된다.

반대로, 세상 밖의 점이 되는 참된 순교는, 히브리서(Hebræer-Brevet)에서 말하듯,[ii]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하고, 고난을 피하기 위한 도움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순교는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순교는, 그리고 특히 여기서 말한 이해 방식으로 수행되는 순교는, 기독교에서의 핵심 원리(cardo rerum)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결국 순교에 대한 이해가 점진적으로 변화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순교의 개념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수천 명의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순교에 대한 개념이 변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세상과의 동질화(세속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이후 점차적으로 순교의 수가 줄어들게 된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너무 엄격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순교의 개념은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가며, 교회는 점점 더 타협적이게 되고, 점점 더 요구 수준을 낮추게 된다.

마침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순교자가 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선택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마치 약자를 배려하는 교육적 접근이나 인도주의적 태도처럼 아름다운 명분으로 포장된다. 또한 이는 열광자나 광신자처럼 순간의 가능성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God Nat Ole!(잘 자라, 올레!) 기독교가 완전히 세상과 동질화되었다. 매 순간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이자 세속적 공식에 불과하다. 이런 태도는 결코 세상을 움직일 수 없으며, 세상 밖의 독립적인 관점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온전히, 철저하게, 완벽하게 세상 속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기독교라 불리고 있다. 사제들은 자녀를 낳고, 주교들은(: 엥겔스토프트) 세 쌍둥이를 얻는 등,[iii] 모든 것이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고, 어떤 감각적 이미지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변질이다. 그 변화는 너무나도 커서, 그것을 충분히 설명할 방법조차 없다.

 

 



[i] 키르케고르가 인용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고찰: 바깥의 점(Punktet udenfor)”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르키메데스(287-212 BC)의 유명한 말에서 유래했다. 아르키메데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내가 설 수 있는 단 한 점만 준다면, 나는 지구도 움직일 수 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 작가 플루타르코스(Plutark)의 저서 Vitae Parallelae (De parallelle liv, 비교 열전) 중 마르켈루스(Marcellus) 전기(14 7)에 나온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가 기하학적 원리를 실제 물리적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그는 심지어 “만약 내가 설 수 있는 또 다른 지구가 있다면, 지금의 지구도 움직일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전한다. 이는 물리학에서 지레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확장한 비유이다. , 충분히 긴 지레와 단단한 지지점이 있다면, 어떤 무거운 것도 들어올릴 수 있다는 원리이다.

 

키르케고르의 적용

키르케고르는 이 물리학적 원리를 실존적이고 신학적인 맥락으로 확장한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 내부의 논리와 질서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며, 세상 밖의 절대적 기준(절대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바깥의 점(Punktet udenfor)’은 곧 절대적 신앙과 참된 순교(Martyriet)를 의미한다. 순교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고난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감수하는 실존적 결단을 뜻한다. 이런 절대적 위치에서만 비로소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 아르키메데스가 지구를 움직이기 위해 바깥의 지점이 필요하다고 했듯, 기독교적 실존 역시 세상과는 다른 절대적 기준에서 출발해야만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주장이다.

[ii] 이 구절은 아마도 히브리서 12 4-5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구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않았으며, 또 아들들에게 하시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중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이 구절은 고난과 시련을 신앙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나 시련을 피하려 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회피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통해 진정한 순교자는 도움을 거부하고, 고난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순교가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그의 주장과 연결되며, 세상적인 방식으로 고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신앙의 결단으로서 고난을 감당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iii]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Engelstoft, faae Trillinger”는 당시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주교였던 크리스티안 토르닝 엥겔스토프트(Christian Thorning Engelstoft, 1805-1889)를 지칭한다. 그의 아내인 로비세 엥겔스토프트(Lovise, født Holm) 1854 4 29일에 세 쌍둥이 딸을 출산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기독교의 세속화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사제들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는 모습을 기독교의 타협과 세속화의 상징으로 보았다. 초기 기독교에서 고난과 희생, 특히 순교가 신앙의 핵심이었으나, 점차 교회 지도자들이 편안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엥겔스토프트는 당시 덴마크 신학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1852년부터 덴마크 퓐 주교로 활동했다. 그는 신학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Theologisk Tidsskrift(신학 저널)을 공동 편집하며 신학적 논의를 주도했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인물의 사생활과 세속적 삶을 언급함으로써, 교회가 더 이상 초기 기독교의 고난과 희생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