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 해설
왜 키르케고르가 고통(Lidelse)을 설명하면서 스피노자와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두 철학자 사이의 진리와 정념, 능동과 수동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날카롭게 대조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이 대조는 단순한 반박이나 논쟁이 아니라, 깊은 철학적 변증법 속에서 고통의 실존적 본질을 밝히려는 키르케고르의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 스피노자와 키르케고르: 왜 고통의 문제에서 만나는가?
◉ 스피노자: 고통은 수동성(passio)이다.
• 스피노자에게 정념(Affekt)은 우리가 **충분한 원인(adequate cause)**이 아닌 상태에서 외적 영향을 받아 생기는 신체적 변화입니다. 우리가 그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다면, 그 감정은 수동적인 고통, 즉 passio가 됩니다. 이때 고통은 무지의 결과이며, 이를 극복하려면 참된 인식(adequate idea)을 통해 능동적인 존재로 전환해야 하죠.
◉ 키르케고르: 고통은 실존의 진리이다.
• 키르케고르에게 고통은 단순한 수동적 정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존의 진리에 이르는 통과의례이며, 인간이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로 서기 위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극복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존재를 형성하는 핵심 계기이며, 때로는 **신적 진리(역설)에 대한 실족(forargelse)**을 통해 나타납니다.
2. 왜 키르케고르는 스피노자를 인용하면서도 그를 넘어서려 하는가?
키르케고르는 스피노자를 논리적이고 폐쇄된 인식체계의 전형으로 봅니다. 그는 스피노자가 진리를 빛처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았던 것에 대해, 진리는 단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선택되고 살아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 스피노자: “진리는 스스로와 거짓을 함께 드러낸다” (진리는 인식의 기준이다)
• 키르케고르: “진리는 고통 속에서만 성립한다” (진리는 실존의 모험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스피노자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스피노자의 개념을 끌어다가 실존적 반전을 줍니다. 예컨대 스피노자가 “정념은 수동성이다”라고 정의할 때, 키르케고르는 말하죠: “그 ‘수동성’은 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무방비로 드러날 때 생기는 존재론적 고통이며, 그 고통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진리로 향하는 길이다.”
3. 키르케고르가 스피노자를 언급하는 이유
요약하면, 키르케고르는 스피노자를 통해 다음을 하려 합니다: 정념을 단지 철학적 개념으로 다룬 철학 전통을 비판하고, 고통을 실존의 불가피한 형식으로 제시하며, 인간이 진정한 자기(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의 실존적 수동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affekt는 sindslidelse(정신의 고통)이다’라고 말하며, 스피노자의 개념을 되받아쳐 고통의 실존적 진리성을 드러냅니다.
마지막 한마디 요약
스피노자는 “우리가 원인이 되지 않는 고통은 수동성(passio)”이라고 했지만,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진실한 고통이 되며, 그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실존으로 서기 위한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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