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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고통에 대한 관점, 스피노자, 프랭클, 키르케고르

스피노자의 수동적 고통(passio)과 빅터 프랭클의 의미 없는 고통, 그리고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고통

 


◉ 스피노자의 수동적 고통 = 의미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무기력

스피노자에게서 passio(수동적 정념)는,

 

“우리가 그 원인에 대해 충분한 인식을 가지지 못할 때 생기는 정서”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그만큼 우리를 휘두르는 감정이 됩니다.

 원인을 알 수 없고,  전체 체계 속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없고, 통제 불가능하므로 극복 불가능한 정념이 됩니다.

 

이건 바로 프랭클이 말하는,

 

“고통이 ‘의미’를 상실했을 때, 그 고통은 파괴적인 것이 된다”는 명제와 정확히 겹치죠.

 


◉ 빅터 프랭클: 고통이 의미 없을 때, 그것은 인간을 무너뜨린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분명히 말하죠:

 

“인간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왜’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니체의 말을 인용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어떻게’도 견뎌낼 수 있다.”

 

여기서 의미를 잃은 고통 스피노자의 passio, 즉 ‘원인을 알지 못하는 고통’, ‘인식 밖에 있는 정념’과 본질적으로 같은 모습입니다.

 


◉ 키르케고르: 고통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탄생을 위한 공간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 둘과 달리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고통은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의미가 실존 속에서 형성되는 그 자리이다.”

 

즉, 고통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만 진리와 자기가 탄생하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입니다.

 

 스피노자에게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무지이고,  프랭클에게 고통은 의미 없으면 파괴적인 실재지만, 키르케고르에게 고통은 **참된 실존이 태어나는 산고(産苦)**입니다.

 

그는 심지어 말하죠:

 

“고통은 교육자이다. 고통은 영혼의 대학교수이다.”

 


요약: 당신이 지적한 연결을 정리해보면

사상가 고통의 본질 극복 가능성 의미
스피노자 인식되지 않은 신체의 수동적 변형 가능 (adequate idea를 통해) 외적 인식 구조 내에서만 주어짐
빅터 프랭클 의미 없는 고통은 파괴적 가능 (의미를 부여할 때) 삶 속에서 발견되어야 함
키르케고르 실존의 탄생,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 형성 불가피하며 필연 고통 자체가 의미의 자궁

 

 


덧붙임: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단지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이 진리 앞에 서도록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존이란 무엇인가?바로, 고통을 진리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