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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상

실족한 자가 자기의 본성에 따라 말하지 않는 이유

이것은 철학의 부스러기 3장 부록에 대한 주석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실족 개념 요한복음 8장 44절, 그리고 거짓(løgn)과 역설(paradox) 사이의 미묘한 관계

 

“실족한 자는 자기 안에서 역설을 오해하여 반응한 것이지, 악마처럼 거짓을 의식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실족한 자는 ‘거짓의 아버지’인 마귀의 영역에 속한다기보다, 진리를 무의식적으로 왜곡해서 되받아친 존재가 아닌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실족한 자는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악마”와 다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역설을 왜곡하여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실존적 실족의 비극성입니다. 그는 실족을 악(ondskab)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와의 마주침에서 발생한 ‘실존의 실패’이자, 아직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 구조적으로 정리해보면:

구분 실족한 자 (Den Forargede) 마귀 (Djævelen, Joh 8:44)
진리에 대한 위치 진리(역설)를 오해하고 무의식적으로 왜곡함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고 거짓을 창조함
말의 출처 자기 것으로부터 말하지 않음 → 역설을 왜곡해 반응 자기 것으로부터 말함 → 의도된 거짓
의도성 무의식적/실존적 오해 의도적/악의적 반역
가능성 믿음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실존 회개와 단절된 절대적 부정

 

 


🧩 키르케고르가 실족한 자를 두둔하진 않지만, 정죄하지도 않는 이유:

 

실족은 진리에 대한 실패한 반응이지만, 그 반응 자체는 진리를 경험하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합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족은 진리가 정말로 ‘들려졌다는’ 표지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진리에 대해 여전히 실존적으로 열려 있는 자입니다.

 

이 점에서 실족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길목에서의 실존적 분열 상태입니다.

 


🕯 그래서 “청각적 기만”이 중요한 이유:

 

실족한 자는 자기 안에서 울린 역설의 음성을, 밖에서 들려온 모욕처럼 왜곡해서 반응합니다. 이것이 무의식적 왜곡이며, 그는 자기가 ‘거짓을 말한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귀처럼 “자기 것으로부터 말하는 자”는 아니며,

 

오히려 “자기 아닌 것(역설)으로부터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잘못 듣고 반응하는 자”입니다.

 

 

📘 키르케고르의 의도적 구분:

그는 마귀(거짓의 아버지)와 실족한 자를 구별합니다:

 마귀는 악의적 자유의지로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을 창조함.
 실족한 자는 진리를 들었지만, 그 진리를 감당할 실존이 없어 무너짐.
 둘 다 진리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존재지만, 하나는 폐쇄(자기 안에서 거짓), 다른 하나는 개방(진리로 나아갈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 요약하면:

실족한 자는 마귀에 속한 자가 아니라, 진리를 잘못 들은 자이다. 그는 진리를 듣고도 파열된 자이며, 그 파열 속에서 역설을 거꾸로 되받아친다. 그의 말은 그의 것이 아니며, 그 오해 속에서도 여전히 진리의 그림자, 역설의 반향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