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에 나오는 단락은 다음을 참고하라. Pap. X3 A 568, 569, 577.
[여백 주석: 《기독교의 훈련(Practice in Christianity)》 제1편에 삽입된 구절에 대하여]
《기독교의 훈련》 제1편에
삽입된 그 구절들에 관하여.
분명 누군가는 그것들을 단순히 장난삼아(comically) 읽을 생각을 할 것이다. 파울리(Paulli)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말이다. 파울리와 그 일당은 그런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양 퍼뜨리는 점잖은 험담꾼(gossip)들이다. 그것이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진정으로 새롭고 의미 있는 것은 언제나 그런 오해와 남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법이다. 그 밖에, 나는 그 구절들에서 사용된 ‘희극적(the comic)’ 혹은 ‘유머러스한(the humorous)’ 표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예술적(미학적, esthetic)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라. 비극(tragedy) 안에 처음으로 희극적 요소를 도입한 사람은, 내가 보건대, 분명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불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비극 속에 희극을 삽입함으로써 오히려 비극의 깊이를 강화시켰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미학적 논의는 잠시 잊자.
그러나 왜 종교적 강화(religious discourse)에서 ‘희극적 요소(the comic)’를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 시대는 이상(ideal)을 향해 닮아가고자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childlike naïveté)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기독교는 이제 세속적 지혜(worldly sagacity)의 단계에서 멈춰 섰다. 그 세속적 지혜는 이상에 작별을 고하며,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광신(fanaticism)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이 세속적 지혜다. 그런데 이 세속적 지혜는 ‘종교적인 것’을 오직 주일의 의식적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으로만 표현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일의 의식적 경건함은 이제 설교의 주된 범주(category of preaching)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세속적 지혜는 인생의 나머지 모든 부분을 자신이 채워 넣고, 이 주일의 경건함을 ‘실제화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 이기 때문에 묵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극적 요소(the comic)는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과 ‘일상생활(daily life)’ 사이의 모순(incongruity)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로 이 점 때문에,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을 연출하는 세속적 지혜(worldly sagacity)는 이 희극적 사용에 대해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세속적 지혜가 신중하게(circumspectly) ‘종교적인 형태(religiousness)’를 취한다면, 그것이 바로 문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 그 자체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JP VI 6694 (Pap. X3 A 568), 1850년.
해설: 이 일기 구절에서 키르케고르는 ‘종교 강화 속의 희극성(the comic in religious discourse)’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에게 '희극'은 단순한 유머나 조롱이 아니라, 진리를 폭로하는 아이러니의 도구이다. 당시 덴마크 국교회의 신앙은 '주일의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으로 대표되는 형식적 신앙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경건하지만, 평일에는 세속적 지혜 속에 살아가며, 이 모순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모순(incongruity) 을 드러내기 위해 희극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희극적 아이러니는 종교를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라, 종교를 진지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 즉 경건함의 위선과 현실의 괴리를 폭로하여 참된 내면적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는 도구이다. 요컨대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희극은 아이러니의 신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은 경건한 외형을 깨뜨리고, '진정한 신앙'이란 일요일의 의식이 아니라 매일의 실존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삶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백 주석: Pap. X3 A 568의 주석]
페테르(Peter, 키르케고르의 형)는 이 구절들이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간단히 암시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오, 신들이여(Ye gods), 그게 그렇게 현명한 조언이라는 말인가! 아니, 암시(indicate)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이미 《사랑의 실천(Works of Love)》에서 시도해 보았고, 그 결과를 보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것들(즉, 진정한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에서 가능한 한 빨리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하는 대신, 그들은 "너무 장황하다"는 현명한 비평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페테르는 언제나 하찮음(triviality)과 결탁해 왔고, 그 하찮음 속에서 그의 인생을 낭비해 왔다.
결국 항상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내가 쓰는 것처럼 실질적인(substantial) 책을 쓰는 일은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 것처럼 취급된다. 누구나 이렇게 말한다. “그 정도야 나도 할 수 있지! 작가가 어떻게 썼어야 하는지, 단 한 가지 힌트만 주면 되잖아.” 이게 바로 덴마크의 현실이다. 덴마크에는 아무런 비평적 기준(criterion)이 없기 때문에, 이런 평범한 자들의 장난과 놀이(fun and games for mediocrity)가 판을 친다. 사실 《기독교의 훈련(Practice in Christianity)》 제1편 전체는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으로부터의 거대한 탈출(tremendous break-out)이다. 여기서 '탈출(break-out)'이란, 죄수가 감옥에서 탈출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이 다시 나타나 자기 중요성을 뽐내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 그중 일부는 괜찮았어.” 그러니까,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이야말로 정말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옛것(old)을 그대로 두되, 새것(new)은 4실링어치(4 cents' worth)만 있으면 돼.”
--JP VI 6695 (Pap. X3 A 569), 1850년.
해설: 이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의 훈련》 제1편에 대한 당대 독자들의 반응-특히 P. L. Møller 혹은 P. Paulli류의 평론가들을 겨냥해-당대의 비평적 천박함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글이 단순한 도덕적 설교가 아니라, '주일의 형식적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으로부터의 실존적 탈출-곧 진정한 기독교 실존의 각성을 촉구하는 작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지나치게 길다", "좀 과하다", "조금만 쓰면 좋았을 텐데"라며 미학적 취향의 문제로 격하시킨다. 키르케고르에게 이러한 비평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형식적 종교성의 자기방어", 즉 진리를 회피하기 위한 교양적 위선이다. 그는 이를 통렬히 풍자하며, "우리는 옛것은 그대로 두되, 새것은 4실링어치만-조금만"이라는 말로 덴마크 교회의 타협적 신앙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Curiosum
며칠 전 시베른(Sibbern)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군가가 《기독교의 훈련(Practice in Christianity)》 제1편에 삽입된 구절들을 순전히 희극적(purely comic)인 것으로 읽었으며, 그 문제의 심각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시베른은 이 말을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사실, 그것이 현실이라면 정말로 현대 성직자들에 대한 훌륭한 풍자(splendid satire)가 될 것이다. 비록 내가 그런 말썽을 바라지는 않지만 말이다. - JP VI 6696 (Pap. X3 A 577), 18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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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 짧은 일기에서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의 훈련》이 당대 교회 내에서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를 유머러스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살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라는 아이러니적 삽입 구절을 '희극적 풍자'로 오독했으며, 일부는 심지어 그것이 교회적 질서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꼈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반응을 조롱 섞인 아이러니로 되받는다. 그는 말한다 - "그렇다면 그 자체가 이미 교회의 풍자 아닌가?" 즉, 신앙의 본질을 회피한 채 '형식적 경건함(Sunday ceremoniousness)'에 갇힌 성직자들의 태도야말로, 그의 저술이 겨냥한 비판의 정확한 표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구절은 키르케고르의 자기 아이러니(self-irony)와 종교적 풍자의 기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희극적으로 오해받는" 바로 그 사실 속에서, 당대 교회의 무감각한 현실이 스스로 폭로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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