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왜 공동체 개념에 매몰되는가
— 사회성의 불가피성과 교회의 불가능성 사이에서
인간은 사회 밖에 설 수 없다. 이 명제는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인간 이해의 기본 전제로 기능해 왔다. 인간은 언어, 관계, 제도, 몸을 통해서만 자신을 형성하며, 고립된 개인은 사유 속에서만 가능한 추상적 가설일 뿐이다. 사회학은 이 전제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고, 현대의 인간학 역시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이해한다. 문제는 이 사회성의 전제가 교회 이해로 그대로 이행될 때 발생한다.
대다수 교회론은 무의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따른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교회는 그 공동체의 종교적 형태라는 것이다. 이때 교회는 ‘기독교적 가치로 조직된 공동체’, ‘윤리적으로 성숙한 사회’, 혹은 ‘대안 사회’로 이해된다. 이러한 교회론은 공동체를 강조하고, 참여와 연대, 관계의 회복을 핵심 범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접근은 교회를 설명하는 데 익숙한 언어를 제공하는 대신, 교회의 본질을 사회성의 변형으로 환원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순수한 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외재적 회중과 가시적 공동체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이 사회성에서 연역될 수 있다는 주장, 곧 사회성이 교회의 근거가 된다는 사고를 단호히 거부한다. 교회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 확장이나 사회적 결속의 종교화가 아니라, 영(spirit)의 차원에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은 단순한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 단절을 의미한다. 사회성은 정신–육체의 종합이라는 자연의 범주에 속하며, 동일성, 위계, 비교, 다수의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반면 교회는 영원성의 침입, 곧 인간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는 사건에서 발생한다. 공동체는 이 사건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이며, 본질이 아니라 수용(accommodation)이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를 통해 존재하지만, 공동체에 의해 성립하지는 않는다.
이 긴장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1장 성찬 논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성찬을 행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고, 성찬을 사회적 식사의 논리 안에서 지속했다는 데 있다. 부유한 자는 배부르고 가난한 자는 굶주리는 상황은 단순한 예의 문제나 윤리적 결함이 아니라, 교회가 사회로 붕괴되었다는 징후다. 바울이 말하는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함”은 개인의 내적 경건 부족이 아니라, 사회성이 여전히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고발이다.
이 지점에서 성찬은 결정적으로 재정의된다. 성찬은 공동체를 강화하는 의례가 아니라, 사회성이 공동체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을 중단시키는 사건이다. 성찬은 관계를 미화하지 않고, 질서를 조정하지 않으며, 공동체를 프로그램처럼 형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찬은 십자가 앞에서 모든 사회적 구분과 위계를 잠정적으로 정지시키며, 교회가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선언하게 한다. 이 선언은 말이나 교리로 이루어지지 않고, 먹고 마시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대 교회론이 공동체 개념에 매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는 설명 가능하고 관리 가능하며 측정 가능한 범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교회는 영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적 조직으로 전환된다. 키르케고르와 바울이 공유하는 통찰은 명확하다. 인간은 사회 밖에 설 수 없지만, 교회는 사회성에 근거할 수 없다. 교회는 언제나 사회 안에 있으되,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구별되어야 하는 긴장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는 공동체를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공동체는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영 앞에 선 인간의 생성이며, 성찬은 그 생성이 사회성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중단을 가하는 사건이다. 이 중단이 사라질 때, 교회는 가장 성공적인 공동체가 될 수는 있어도 더 이상 교회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