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역사 관련 일기(자기 자신을 아는 것, Pap. VII1 A 200)
자연과학과 관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은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서 있고 통제 불능이다. 연구자는 구체적인 것들로 당신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시작한다. 즉, 지금 호주로 가고, 이제 달로, 지하 동굴로, 내장 벌레를 찾으러 똥구멍으로 가기도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한 순간에는 망원경이 필요하기도 하며, 다른 순간에는 현미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악마의 이름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다! 농담은 차치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혼란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철학이 자연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무엇이 무엇인지, 변증법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모두 은유의 기발한 언어인가? (이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는 게 더 낫다.) 이것은 예증인가, 유비인가? 혹은 우리의 이론을 자연과학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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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nothing)에 대하여(Pap. VIII2 B 58:3 n.d., 1847)
사랑을 찬양하는 일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오랫 동안 인내하며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몹시 힘들다. 그때, 육체 안에 가시가 있음을 발견한다. 즉,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여백에서: 여기에 자기 부인(Self-denial)이 있다. -Pap. VIII2 b 58:3 n.d., 1847 *육체 안의 가시: 고린도후서 12:7, 이 부분은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The Thorn in the Flesh," Four Upbuilding Discourses (1844), in Eighteen Discourses, pp. 326-46, KW V (SV V 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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