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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전능에 대하여(NB:69, Pap. VII1 A 181, 1846년) 본문
하나님의 전능과 선함과 악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문제(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고 다만 악을 허용하신다는 이 구별 대신)*는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결국, 존재를 위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그 누가 행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행하기 위해, 전능자가 필요하다. 이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이른바, 존재를 의존하게 만든 것이 전능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자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면, 바로 이런 이유로 전능에 빚진 존재가 독립적일 수 있도록, 전능이 나타난 것처럼 다시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능력을 가진 자는 그 속에 갇혀 스스로 포로가 되고 따라서 그가 자유롭게 만들고자 한 자와 잘못된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유한한 능력(재능 등)에는 유한한 자기 사랑(self-love)이 포함되어 있다. 오직 전능자만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동시에 스스로 물러날 수 있다. 이 관계가 받는 자의 독립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선함이다. 선함이란 완전히 거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능하게 자신을 다시 취함으로써 받은 사람이 독립적으로 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이다. 모든 유한한 능력은 존재를 의존적으로 만든다. 오직 전능자만 존재의 독립을 창조할 수 있다. 무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끊임없이 전능하게 물러남으로써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전능자는 타자와의 관계에 내재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전능자는 비교될 만한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전능자는 그 능력의 눈곱만큼도 포기하지 않고 줄 수 있다. 다시 말해, 존재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다. 전능자가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을 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전체 눈에 보이는 세계),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을 창조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즉, 저 전능자에서 독립할 수 있는 동등한 존재다. 자신의 강력한 손으로 이 세상을 그토록 강력하게 잡을 수 있는 전능자는 자신이 존재하게 했던 것이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손을 가볍게 할 수도 있다. 단지 능력의 변증법에 대한 비참하고 세속적인 개념만 강제하고 의존성을 만드는 능력과 비례하여 그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고 주장한다.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해 더 잘 이해했다.** 그는 능력의 기술은 정확히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것이 최고의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해도,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이것은 수행될 수 없다. 오직 전능자만 이것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하나님께 맞서 눈곱만한 독립적 존재를 지녔다면(실체[materia, substance]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다시 한 번 존재를 독립적으로 만들 수 있는 전능자의 표현이다. 내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빚지고 있는 그분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해도, 사실 나를 독립적으로 만들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약간의 능력을 상실했다면, 명확히 그분이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을 독립적으로 만드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JP II 1251 (Pap. VII1 A 181) n.d., 1846
* 하나님은 선을 이루시고 다만 악을 허용하신다는 이 구별 대신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전체 질문 ... 악과의 관계: 이것은 신정론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즉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선과 사랑에 반하는 악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말한다. 특히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G.W. Leibniz)가 이 질문에 답하려고 시도한 것을 참조하라. 라이프니츠가 이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는 『신에 대한 질문, 즉, 신의 존재, 인간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기원』, J.C. Gottscheden, 5판에서 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저술은 주로 악은 창조의 결함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 이래의 전통적인 견해에 도전했던 프랑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베일에 대한 반응이다. 베일에게 이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었고, 대신 그는 악과 선의 보편적 힘에 근거하여 선과 함께 악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주로 1740년 독일어로 번역된 『역사학 및 비평』의 “마니교”에 관한 논문에서 이러한 견해를 제시했다.
“똑같이 무한한 선과 연결되어 있는 이 최고의 지혜는 최고 외에는 선택할 것이 없다. 작은 악이 선의 한 유형인 것처럼 작은 선도 더 큰 선을 가로막는다면 악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일에는 비난할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더 건전한 이해를 갖고 있다. ... 능력의 기술은 ... 알았다.] 소크라테스 '(→ 13,15) majeutics (→ 24,30), 특히 수사학을 능력과 설득의 도구로 보는 소피스트들의 인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 고르기아스, 447a - 527e(플라톤의 작품(→ 13,15) vol. 2, pp. 117-217) 참고하라.
이 저널은 '신정론의 문제'를 암시한다. 신이 전능하다면 선과 사랑을 거스르는 악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의 문제. 참조 특히 리조트. 철학자 G.W. Theodicee에서 이 질문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대답, 즉 선하신 신, 인간의 자유, 악의 기원에 대한 시도, ed. J.C.에 의해 Gottscheden, 5th ed., Hanover and Leipzig 1763 [1720], ktl. 619(약칭 Theodiceen).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공헌은 주로 fr. 어거스틴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관점에 도전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피에르 베일(Pierre Bayle)은 악이 창조의 결함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Bayle에게 이것은 이성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대신에 그는 각각 선과 함께 악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했다. 악과 선한 보편적인 힘. 그는 1740년 최신판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Historisches und Critisches Wörterbuch의 "Manichaer"에 관한 기사에서 이 견해를 주로 표현했다. 유명한 Freyherrn von Leibnitz, Herrn Maturin Veissiere la Croze와 함께 다양한 다른 발언, 특히 제공된 공격적 위치가 오버랩되었다. 그리고 에드. J.C.에 의해 Gottscheden, bd. 1-4, 라이프치히 1741-44, ktl. 1961-1964년; BD. 3, pp. 304-311.
Det hele Spørgsmaal om Guds Almagts ... Forhold til det Onde] hentyder til 'theodicéproblemet', dvs. spørgsmålet om, hvordan man kan forsvare, at Gud, hvis han er almægtig, ikke griber ind over for det onde, der strider mod godhed og kærlighed. Jf. især den ty. filosof G.W. Leibniz' forsøg på at besvare dette spørgsmål i Theodicee, das ist, Versuch von der Güte Gottes, Freyheit des Menschen, und vom Ursprunge des Bösen, udg. af J.C. Gottscheden, 5. udg., Hannover og Leipzig 1763 [1720], ktl. 619 (forkortet Theodiceen). Leibnitz's berømte bidrag er i vidt omfang et svar til den fr. filosof og forfatter Pierre Bayle, der havde udfordret den traditionelle opfattelse, som går tilbage til Augustin, at det onde var en mangel ved skaberværket. For Bayle var dette i strid med fornuften, og han søgte i stedet at forklare eksistensen af det onde ved siden af det gode ud fra hhv. en ond og en god universel magt. Dette synspunkt fremførte han primært i artiklen om »Manichäer« i Historisches und Critisches Wörterbuch nach der neuesten Auflage von 1740 ins Deutsche übersetzt; mit des berühmten Freyherrn von Leibnitz, und Herrn Maturin Veissiere la Croze, auch verschiedenen andern Anmerkungen, sonderlich den anstößigen Stellen versehen, overs. og udg. af J.C. Gottscheden, bd. 1-4, Leipzig 1741-44, ktl. 1961-1964; bd. 3, s. 304-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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