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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사랑의 역사 관련 일기(자기 자신을 아는 것, Pap. VII1 A 200) 본문
자연과학과 관계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당신은 무방비 상태로 거기에 서 있고 통제 불능이다. 연구자는 구체적인 것들로 당신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시작한다. 즉, 지금 호주로 가고, 이제 달로, 지하 동굴로, 내장 벌레를 찾으러 똥구멍으로 가기도 한다. 하나님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한 순간에는 망원경이 필요하기도 하며, 다른 순간에는 현미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악마의 이름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다! 농담은 차치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혼란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철학이 자연과학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무엇이 무엇인지, 변증법적으로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모두 은유의 기발한 언어인가? (이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는 게 더 낫다.) 이것은 예증인가, 유비인가? 혹은 우리의 이론을 자연과학에 적용시킬 만큼 충분히 중요한가? 사상가에게는 세부 사항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긴장감만큼 끔찍한 고뇌는 없을 것이다. 반면 항상 그것은 다음에 다가올 생각, 결론인 것처럼 보인다. 물리학자가 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사상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지식인을 얼마나 끔찍하게 애태우는가! 사상가에게, 그것은 영혼의 확실성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즉,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보라(hic Rhodus, hic salta)."(이솝 우화에서) 온 세상이 폭발하고 요소가 다 녹아내리더라도, 당신은 믿음의 영역을 믿는다.
여기서 우리는 우편이나 거짓 보도를 통해 공식적인 소식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정신의 이 확실성, 가장 겸손한 것, 허영심에 가장 공격적인 것(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 너무 멋지기 때문에)이 유일한 확실성이다. 공식적으로, 자연과학에 대한 주요 반대, 전체 반대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고 절대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자신을 정신으로 무한히 반성해 온 인간에게 (경험적 물질로) 물리학을 자신의 노력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현상을 관찰하는 물리학자는 재능과 본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심오하게 변증법거인 것이 아니라, 사물을 냄새를 맡는 것, 기발해지는 것이 하지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재능과 본능의 특징이다.) 또는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쯤 무의식적으로 물리학자가 된 사람이어야 하며, 그 후 습관적으로 그런 종류의 삶에 남아 있어야 한다.
거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그의 발견과 기발함으로 온 세상을 사로잡고 놀라지만 정작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물리학자가 그의 재능의 범위 내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도 그는 놀라운 통찰력, 동시적 재능, 사상에 대한 요술같이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한 뛰어난 재능, 꽤 독특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자연을 설명할 수 있지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정신의 범주, 그의 재능의 윤리적 사용 등에서 자신에게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단지 회의론일 뿐이다.(왜냐하면 회의론은 알려지지 않은 어떤 x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만,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설명되지 않는 x에 의해 설명될 때, 전체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회의론이 아니라면 그것은 미신이다. -JP III 2820 (Pap. VII1 A 200) n. d.,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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