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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무에 대하여(Pap. X2 A 340)

by 엉클창 2022. 4. 25.

 

The System begins with ‘nothing’, mysticism always ends with ‘nothing’. The latter is the divine nothing, just as Socrates’ ignorance was fear of God, the ignorance with which, again, he did not begin but ended, or at which he constantly arrived. -Pap. X 2 A 340, n.d., 1850

Med »Intet« begynder Systemet, med »Intet« ender Mystikken altid. Det sidste er det gudelige Intet, ligesom Socratess Uvidenhed var Gudsfrygt, hans Uvidenhed, med hvilken han atter ikke begyndte, men endte, eller til hvilken han bestandig kom.


체계는 "무"로 시작하는 반면, 신비주의는 언제나 "무"로 끝난다.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신에 대한 두려움인 것처럼, 후자는 신적인 무이다. 다시, 그는 무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끝난다. 혹은 그는 언제나 무지에 도착한다.


해설

이 키르케고르의 일기는 1850년에 쓴 것입니다. 

이 키르케고르의 일기는 체계(System)와 신비주의(Mysticism)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무(Nothingness)“와 연결되는지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1) 체계와 신비주의의 비교, 2) 소크라테스적 무지와 신비적 무지, 3) 신에 대한 두려움과 무의 도착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1. 체계는 “무”로 시작하고, 신비주의는 “무”로 끝난다.

 체계(System): 철학적·논리적 체계는 무(無)에서 시작하여 완전한 지식을 구축하려 한다. 즉, 철학은 처음에는 무지(無知) 속에서 시작하지만, 점진적으로 논리를 통해 지식 체계를 쌓아 올린다고 가정한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는 “무(無)“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려고 한다. 헤겔 철학도 유사한 방식을 따르는데, 그는 “정(正) - 반(反) - 합(合)“의 변증법을 통해 역사가 발전하며 절대정신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신비주의(Mysticism): 반면, 신비주의는 완전한 지식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면서 신적인 무(無)로 향한다. 신비주의자는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신 앞에서 인간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한계를 지닌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철저한 신적 경험을 통해 “신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무(無)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식을 내려놓으며 무(無)에 도달하는 과정을 밟는다.

 즉, 체계는 “무”에서 출발하여 지식을 구축하려 하지만, 신비주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무”에 도달하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2. 소크라테스의 무지와 신적인 무지

 소크라테스적 무지: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무지하다는 것을 안다.” 즉,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각 속에서 철학을 시작한다고 보았다.  그는 일반인들이 아는 것이 사실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며, 진정한 지식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무지는 인간이 신 앞에서 지식적으로 겸손해야 함을 보여주는 철학적 무지다.  그러나 그는 철학적 탐구를 통해 무지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고, 이것이 서구 철학의 전통이 되었다.

신적인 무지: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신비적 무지(mystical ignorance)”를 강조한다. 이 무지는 단순히 “나는 모른다”라는 철학적 회의가 아니라, “나는 신 앞에서 결코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이다. 한마디로, 무지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긴 이야기이므로 생략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에서 출발하지만 철학적 탐구를 통해 더 나아가려 했어. 그러나 신비주의자는 끝까지 무지 속에 머물며, 신 앞에서 절대적으로 겸허해지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그는 무지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로 끝나는 것이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적 무지가 철학적 탐구의 시작점이라면, 신비적 무지는 신 앞에서 도달해야 하는 궁극적인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3. 신에 대한 두려움과 무(無)에 도착하는 과정

소크라테스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델포이 신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불렸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무지라는 사실을 밝혀내면서, “진정한 지혜는 인간이 신 앞에서 무지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는 “신적인 무(無)“에 도달한다.  신비주의자는 단순한 철학적 탐구가 아니라, 존재(Tilværelsen) 자체를 내려놓고 신적 무(無) 속에서 절대적으로 신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도달한다.  즉, 신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신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은 신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無)로 내려놓는 상태를 “신적인 무(nothingness of God)“라고 설명한다.

 즉, 신비주의자는 철학적 무지를 넘어서, 신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신적 무”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식적 겸손이 아니라, 실존적·신앙적 자기 포기이며, 신앙 속에서 절대적으로 신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의미한다.

키르케고르가 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철학적 체계는 “무”에서 출발하지만, 논리를 통해 점진적으로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려 한다.
 반면, 신비주의는 출발점이 아니라 도착점에서 “무”를 발견한다. 즉, 신을 알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로 나아간다.
  소크라테스적 무지는 철학적 탐구를 위한 출발점이지만, 신비적 무지는 신 앞에서 도달해야 하는 절대적 상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철학이 신비주의로 나아가야 하며, 신 앞에서 인간의 무지와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체계는 ‘무’로 시작하고, 신비주의는 ‘무’로 끝난다”

 키르케고르의 이 문장은 철학적 체계(특히 헤겔 철학)와 신비주의(mysticism)의 차이를 대비시키며, “무(Nothingness, Intet)“가 각각의 사유에서 어떻게 다르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키르케고르는 A. Helfferich의 Die christliche Mystik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참고했다.

 


1. 신비주의와 철학적 체계에서 ‘무’의 차이

“신비주의에서는 본래적 사유(思惟)가 멈추는 지점에서, 절대 이념(Absolute Idea)의 사유 속에서는 그것이 해소된다. 그러나 반대로 절대 이념이 신비주의적 사유 속에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독일 신비주의자들이 자주 말하는 ‘비-자아(Nicht-Ich)’ 또는 ’무(Nichts)’라는 개념 속에서 인간 정신은 공간과 시간의 경계를 초월한 깊이 속으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볼 때, 개념철학(Begriffsphilosophie)이 객관적 논리(Objective Logic)를 ‘존재=무(Seyn = Nichts)’로 시작하는 것과 신비주의가 주관적 논리의 끝에서 ‘무’에 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철학적 체계(System): 철학적 체계는 “무”에서 시작한다.

 헤겔 철학에서는 “순수한 존재(reine Seyn)“와 “무(Nichts)“가 동일하다고 본다.

 논리학은 “무”에서 시작하여 개념을 발전시키고, 점차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철학적 논리는 이 “무”를 출발점으로 삼아 점진적으로 절대 이념(Absolute Idea) 속으로 나아간다.

 즉, 철학은 무에서 시작하여 존재를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을 밟는다.

 

 신비주의(Mysticism): 신비주의는 “무”로 끝난다.

 신비주의는 철학적 체계처럼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거듭한 끝에서 ‘무’에 도달한다.

 즉, 신비주의자는 존재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를 소멸시키며 “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신비주의적 체험에서는 이성이 멈추는 곳에서 ‘무’가 도래하며, 그곳에서 신적 체험이 이루어진다.

 

💡 즉, 철학은 ‘무’를 출발점으로 삼아 체계를 구축하지만, 신비주의는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무’ 속에서 신비적 체험을 한다.

 


2. 헤겔 철학과 ‘무’의 개념

✔ 키르케고르는 이미 『한 아직 살아 있는 자의 논문들』(1838)에서 헤겔이 철학을 “무”에서 시작하려 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에서도 철학이 항상 “무”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철학이 시작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무’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 1845년의 기록 *“시작의 변증법(Begyndelsens Dialektik). 저승에서의 장면(Scene i Underverdenen)”*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저승에서 헤겔에게 묻는다.

 소크라테스: “당신은 어떤 전제를 가지고 시작하는가?”

 헤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헤겔(추가 답변): “나는 ‘무’에서 출발한다.”

 

✔ 이는 헤겔의 『논리의 학(Wissenschaft der Logik)』에서 논리학이 ‘순수한 존재(reine Seyn)’로 시작하지만, 그것이 결국 ‘무(Nichts)’와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헤겔 전집(Georg Wilhelm Friedrich Hegel’s Werke), 3권, 59-74쪽

 

✔ 또한, 덴마크의 대표적인 헤겔주의 철학자 J. L. 하이베르그(J.L. Heiberg) 역시,

 “철학은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상을 확립하며 이를 표어처럼 사용했다.

 『논리 체계(Det logiske System)』 (1838)

 『철학의 철학 또는 변증법적 논리의 개요(Grundtræk til Philosophiens Philosophie, eller den speculative Logik)』 (1832)

 

💡 즉, 키르케고르는 헤겔 철학이 ‘무’를 출발점으로 설정한 방식을 비판하며, 신비주의적 ‘무’가 오히려 더 근본적인 실존적 경험과 연결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3. 철학적 논리와 신비주의의 대립

 

📌 철학적 체계(특히 헤겔 철학)는 “무”에서 출발하여 개념을 발전시키려 한다.

📌 반면, 신비주의는 철학적 탐구를 거듭한 끝에서 ‘무’에 도달하며, 거기서 신적 체험이 이루어진다.

📌 헤겔 철학에서는 ‘무’가 존재의 한 형태로 시작하지만, 신비주의에서는 ‘무’가 존재를 해체하는 최종적인 귀결이다.

📌 즉, 철학은 ‘무’에서 시작하여 존재를 개념적으로 발전시키려 하지만, 신비주의는 존재를 버리면서 ‘무’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철학적 체계(특히 헤겔주의)가 ‘무’를 출발점으로 삼는 방식을 비판하며, 신비주의적 ‘무’의 도달이 오히려 더 진정한 실존적 태도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는 키르케고르의 신앙론과도 연결되며, 신앙이 단순한 논리적 체계 속에서 설명될 수 없는 실존적 도약을 포함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지막 것은 신적인 무(無)이다.”

 A. Helfferich의 『기독교 신비주의(Die christliche Mystik)』(1권, 106쪽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신비주의에서 정신이 ‘무(Nichts)’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자아(自我)의 소멸을 의미할 뿐이다. 즉, 우리의 이기적 원리(egoistisches Prinzip)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정신(Geist)이 완전히 존재하지 않거나 개인적 존재(personal existence)를 상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신비주의에서 ‘무(Nichts)’라는 표현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먼저 자신의 모든 자기애(self-love)를 뿌리 뽑고, 세상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1. 신적인 무(無)란 무엇인가?

 

✔ 여기서 말하는 *“신적인 무(Det gudelige Intet)”*는 단순한 존재의 소멸이나 무(無)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 이는 “자아(自我, Ichheit)“의 소멸을 의미하며, 특히 이기적인 본성과 자기애가 철저히 제거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 그러나 개인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헌신 속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획득한다.

 

💡 즉, 신적인 무(無)는 단순한 존재론적 무가 아니라, 신 앞에서 자아가 완전히 포기되는 영적 상태를 의미한다.

 


2. 신비주의적 무(無)의 특징: 자기 소멸이 아니라 자기 초월

 

✔ 신비주의 전통에서 ‘무’는 단순한 소멸(消滅)이 아니다.

✔ 이는 오히려 **“자신의 모든 자기애와 세속적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 즉,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자만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 여기서 ‘무’는 단순한 비존재(non-being)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self)’가 완전히 변화되는 상태를 뜻한다.

 


3. 키르케고르의 신앙과 신적인 무(無)

 

📌 키르케고르는 신앙이 단순한 철학적 논리로 이해될 수 없는 실존적 도약이라고 본다.

📌 신앙 속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 여기서 ‘신적인 무’란 단순한 존재론적 소멸이 아니라, 신 앞에서 모든 자기 의지를 내려놓는 실존적 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신적인 무”는 단순한 비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애와 세속적 집착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는 실존적 신앙과 깊이 연결되는 개념이다.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가장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다.

✔ 그는 직접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아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 플라톤 등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그의 사상과 성격이 기록되었다.

✔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a)』에 따르면,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고 선언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신조를 통해 지혜를 탐구하였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은 지혜롭다고 착각하지만, 자신은 무지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신탁이 옳다고 보았다.

 


1. 소크라테스의 무지(Uvidenhed)와 신에 대한 두려움(Gudsfrygt)의 관계

 

✔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1849)에서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일종의 신에 대한 두려움(경외, Gudsfrygt)이며, 일종의 신앙적 태도라고 해석한다.

✔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편 111:10, 잠언 9:10)**이라고 말하는데,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단순한 회의주의나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라, 신 앞에서 겸손해지는 태도이다.

✔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를 가졌다고 착각하는 것을 경계하며, 오직 신만이 참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태도를 단순한 인식론적 무지가 아니라, 신에 대한 경외로 해석하며, 이를 유대교적 신앙과 연결시킨다.

 


2. 키르케고르의 해석: 소크라테스적 무지와 신앙의 시작

 

✔ 『죽음에 이르는 병』(1849)에서 키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일종의 신에 대한 두려움이며 경외였다. 그의 무지는 그리스적 철학에서 유대교적 신앙과 연결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듯,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 참된 지혜로 가는 길임을 알았다.”

 

✔ 여기서 그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단순한 철학적 회의주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겸허함의 표현으로 본다.

✔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말할 때, 이는 신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 이는 키르케고르가 강조하는 **“신앙은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과도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 즉,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적 무지를 단순한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라, 신앙적 태도의 일환으로 해석한다.

 


🔥 결론: 소크라테스적 무지와 키르케고르의 신앙관

 

📌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경외심과 연결된다.

📌 키르케고르는 이를 성경적 지혜(“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와 비교한다.

📌 소크라테스가 신 앞에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듯, 참된 신앙도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무지를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 앞에서의 실존적 태도로 해석하며, 이를 신앙과 연결시킨다.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는 단순한 인식론적 겸손이 아니라, 신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실존적 태도로서, 키르케고르의 신앙론과 깊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