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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어거스틴, 도나투스 일기 정리(NB23:166부터) 본문
NB23:166, Pap. X 4A 171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주장:
도나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세속적 권력이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에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의 본보기를 주셨다.”
출처: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384쪽
- 도나투스주의의 핵심 사상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순교적 삶에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여 진리를 강요하거나, 타인을 억압하는 것을 기독교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진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질이라고 믿었습니다. - 키르케고르의 맥락
키르케고르는 이 도나투스주의적 이상을 통해 세속적 권력과 기독교의 결합을 비판하고, 기독교의 진정성이 개인의 내적 결단과 고난을 통한 증언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 어거스틴과의 대립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에게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며, 이를 통해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반면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은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죽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본질적 윤리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 키르케고르의 입장
키르케고르는 도나투스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가 비판해 온 세속적 교회와 권력의 문제를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속적 강제나 폭력을 통해 유지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고난과 희생을 통해 진정한 신앙이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NB23:167, Pap. X 4A 172
어거스틴은 “권위에 대한 신앙(authoritative faith)”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설령 권위 때문에 잘못된 것을 믿게 된다 하더라도, 아무런 권위를 믿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는 당연히 권위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복종과 순종(obedience, subjection)은 본질적으로 유익한 것이다. 그는 또한 사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금욕(asceticism)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저서에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했다. 그의 견해는 신앙을 강제로 강요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강제에 의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신앙적 장애물(열정, 욕망 등)을 제거하기 위해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통해 신앙이 개인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뵈링거의 저서 1권, 3부, 특히 357쪽 이후(pp. 357ff.)와 367쪽 하단과 368쪽에 내가 언급한 것이 상세히 다루어져 있다.
*참조: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1845년, 253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권위에 의해 기만당하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어떠한 권위에도 이끌리지 않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맥락
이 인용은 어거스틴의 권위(authority)에 대한 신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그는 인간이 진리로 이끄는 권위를 따르지 않을 때 더 큰 혼란과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권위란 단순히 억압적인 강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한 교육적 안내자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기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어거스틴과 권위의 윤리적 측면
어거스틴은 권위(authority)의 윤리적 측면을 강조하며,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249~257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어거스틴의 인용 (249~250쪽): “우리가 여전히 미련한 사람들의 범주에 속해 있는 한, 그러나 완전히 선하고 경건한 삶을 갈망해야 하는 한, 인간 삶의 더 거룩하고 고귀한 관계에서 저지르는 모든 잘못은 복종과 경외심에 대한 의무의 정도에 따라 더욱 죄악되고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검증된 권위를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음이 가능한 한 최소화되고, 궁극적으로 완전히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뵈링거의 해설 (251쪽): “겸손(Demuth)은 단지 스스로를 더 높은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권위에 대한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훈련이자, 그의 구원의 진정한 시작이며, 본질적으로 윤리적입니다.”
권위와 지식의 관계 (257~258쪽): “권위에 대한 신앙은 지식의 전 단계이자, 도덕적이고 지적인 조건으로서의 교육적 토대입니다. 권위에 대한 신앙은 단지 ‘젖’에 그치지 않고, 인간 전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 아래 복종시키는 훈련(zucht)입니다. 이는 그 권위에 합당한 삶을 결과적으로 가져옵니다.”
핵심 내용
1. 권위의 윤리적 가치: 어거스틴은 복종과 경외심이 인간의 윤리적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권위에 대한 신앙은 인간이 내적 어리석음에서 해방되고 더 고귀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다.
2. 권위와 지식의 관계: 권위에 대한 신앙은 지식으로 가는 전 단계로서 작용하며, 윤리적이고 지적인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한 수동적 복종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 아래 두는 적극적 행위이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본 비판 가능성
키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권위에 대한 신앙”이 개인의 실존적 결단과 내적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신앙이 외적 권위가 아닌, 개인의 내적 선택과 책임에서 비롯된 실존적 관계라고 보았다.
특히 키르케고르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기독교를 세속적 제도나 조직의 틀 안에 가두는 위험성을 경계했으며, 기독교의 본질은 개인의 내적 결단과 고난 속에서 드러나는 진리에 있다고 믿었다.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어거스틴의 금욕에 대한 요구는 아마도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저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1845년, 255쪽에서 다룬 다음 구절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뵈링거의 설명 (255쪽): “이 종교적 인식(religiøse Erkenntniss)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세상이라는 다양성(Vielheit) 속에서 벗어나, 감각적 세계의 기만적인 현상으로부터 그 하나(den Einen)에게로 돌아가고,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모든 피조물, 감각적, 영혼적, 그리고 정신적 것을 넘어 궁극적 근원(Urgrund), 궁극적 이성(Urvernunft), 즉 하나님께 상승하는 것이다.’ 이러한 ‘되돌아감(뒤로 물러남, Zurückziehen)’과 ‘단순화(sich Vereinfachen)’라는 중세적 표현은 직관의 영역에서는 명상(contemplation)과 사변(speculation)을 통해, 의지와 삶의 영역에서는 사랑, 금욕(Askese), 그리고 정화(Reinigung)를 통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핵심 내용
1. 사상가의 길: 사상가에게는 단순히 사변적 사고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영적 수련을 통해 자신의 내적 삶을 정화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2. 금욕과 사랑의 역할: 사랑과 금욕, 정화는 삶의 영역에서 더 높은 종교적 인식과 영적 성숙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간주된다.
NB23:168, Pap. X 4A 173
어거스틴
사람들이 흔히 죄에 대한 인간의 변명으로 내세우는 요소들, 예를 들어, 연약함, 무지, 감각적인 욕망의 지배 등은 어거스틴에 따르면 오히려 죄를 설명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로서 죄의 형벌이라고 말한다.*
*죄는 결과로서 설명되지 말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논리: “우리는 단순히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범죄(offense)만을 진정한 의미의 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러한 범죄의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것도 죄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것은 죄의 결과이자 동시에 죄의 형벌이다.”
출처: 이 내용은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1845년, 408~409쪽에서 다루어진다.
뵈링거의 해설(408쪽): 뵈링거는 어거스틴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상태에서 그의 자유의지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같은 책, 409쪽 상단 참고.
핵심 요점
1. 죄와 형벌의 동일성: 어거스틴은 인간의 연약함과 무지, 그리고 감각적 욕망의 지배를 단순히 인간의 한계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것을 죄의 결과이자 형벌로 보았다.
2. 자발성과 책임: 어거스틴은 죄를 단순히 의도적이고 자발적인 행위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모든 상태 또한 죄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3. 인간 의지의 내재성: 인간의 의지는 그의 상태와 분리되지 않으며, 죄의 상태와 그 결과에 대해 내재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죄(Synd)에 대한 이해:
키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죄에 대한 이해를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에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교리적 관점 모두와 연결시킵니다.
참조 1: 『죽음에 이르는 병』 2장 - “죄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
“죄는 무지(Uvidenhed)이다.”
이는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소크라테스의 모든 가르침처럼 주목할 만한 중요한 주장입니다.(SKS 11, 201-208) 이 정의는 죄를 지식의 결핍이나 무지로 설명하려는 접근입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죄의 충분한 정의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죄를 단순히 부정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참조 2: 『죽음에 이르는 병』 3장 - “죄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죄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라는 것은 정통 교리와 정통주의가 끊임없이 주장해 온 내용이며, 범신론적 관점에서 죄를 단순히 부정적, 연약함, 감각적 본성, 유한성, 무지 등으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한 이유이기도 하다.” (SKS 11, 209-212)
키르케고르는 죄를 단순한 **부정적 상태(negation)**나 연약함, 감각적 성향, 유한성으로 축소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대신 그는 죄를 **적극적인 존재 방식(posi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정통 교리가 강조해 온 입장과 일치합니다.
요약
1. 소크라테스적 관점: 죄를 무지로 이해하는 접근은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지만, 죄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2. 정통 신학적 관점: 죄는 단순히 부정적 상태나 약점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적극적인 행위 및 존재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죄의 본질을 더욱 깊이 통찰할 수 있게 합니다.
키르케고르와 어거스틴의 연결
키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죄에 대한 이해를 참조하며, 죄가 단순히 변명될 수 없는 존재 방식이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특히 연약함, 무지, 욕망 등이 죄의 결과이자 형벌이라는 어거스틴의 주장은 키르케고르의 신학적 분석과 긴밀히 연결됩니다.
결론
키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관점을 확장하며, 죄를 단순히 무지나 약점으로 변명할 수 없는, 적극적인 실존적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죄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와 정통 신학적 이해를 비판적으로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죄와 형벌에 대한 이해
프리드리히 뵈링거(Friedrich Böhringer)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증인들(Die Kirche Christi und ihre Zeugen)』 1권, 3부, 1845년, 407~408쪽에 기록된 어거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어거스틴의 주장: “죄의 유일한 근원이 자유의지라는 주장에 대한 더 중요한 반론은 무지와 무능력이라는 요소입니다. 이러한 요소는 잘못된 행위를 낳는 것으로 인정되지만, 어거스틴은 이를 원래의 본성이 아니라 이미 타락한 본성의 특성으로 봅니다.” “따라서 이는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결과이며, 자연스럽고 철저히 공정한 죄의 형벌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죄의 정의와 형벌:
1. 죄의 정의: 어거스틴은 죄를 단순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잘못된 행위로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의 필연적 결과 또한 죄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죄의 형벌이자 죄 자체로 보았습니다.
2. 형벌로서의 무지와 무능력: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의 가장 공정한 형벌은 각자가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잃는 것입니다.”
• “알면서도 잘못을 행한 자는 올바른 것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잃게 됩니다.”
•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는 올바르게 행동하고 싶어 할 때 그 능력을 잃게 됩니다.”
3. 결론: “따라서 모든 죄 지은 영혼의 형벌은 무지와 무능력입니다.”
해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가 죄의 근본이라고 말하면서도, 죄가 단지 개인의 의지적 잘못뿐만 아니라, 그 필연적 결과와 형벌을 포함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죄의 개념을 단순한 행위적 차원에서 보다 포괄적인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접근입니다.
키르케고르와의 연결
키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의 죄 이해를 자신의 사유에 적극 활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죄의 결과와 형벌을 포함하는 폭넓은 정의는 키르케고르의 **“죄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합니다.
• 키르케고르는 죄를 단순한 약점이나 실수가 아닌, 의도적이고 실존적인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 어거스틴의 논의는 죄와 자유의지, 책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심화된 철학적·신학적 논의의 토대를 제공합니다.
결론
어거스틴은 죄를 의지적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형벌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는 죄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신학적 시도로,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접근과도 강하게 연결됩니다. 둘 다 죄의 책임과 결과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공유하며, 기독교적 윤리와 신학의 중요한 주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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