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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NB11: 187, (Pap. X1 A 489) n.d., 1849, 사랑의 실천 본문
NB11: 187, (Pap. X1 A 489) n.d., 1849
루터의 말은 다시 한 번 완전히 옳다. 아무도 믿음을 볼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은 사랑에 의해 알려진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데, 성경의 지지를 받는 루터는 이에 반대한다. 기독교적으로 사랑은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비기독교적인 사랑의 개념이다. 사실 이것은 미학적 정의이며 에로스 등을 잘 설명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사랑은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면의 감정, 충만한 마음 등이 아니라, 그분의 삶인 사랑의 실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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