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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루돌프 불트만의 핵심 사상 본문
불트만의 신학에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릿도 사이의 연속성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국 기독론은 어느 한 쪽 입장에 따른 반쪽짜리 기독론이 될 수밖에 없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무시한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결국 '예수론(Jesusology)'이 되고, 역사적 예수를 포기한 그리스도는 도그마의 그리스도가 되고 만다. 그동안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보면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마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비평가들은 불트만의 사상에서 역사비평적 연구의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불트만이 역사를 실존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혹은 불트만의 사상에서 역사비평적 연구는 신앙을 위해 아무런 긍정적인 의미를 못가진다는 의견도 있다. 또 불트만에서 역사적 연구와 케리그마의 신학 사이에 큰 간격이 있어서 극복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많은 신학자들은 불트만의 기독론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이 양자 사이에 실제적 연속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
불트만은 구원이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주장을 자주한다. 만약 구원이 '오직'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로서만 가능하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추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예수를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예수가 구원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역사적 예수를 추구할 이유가 없어진다. 나아가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 지점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를 논의해보자. 불트만은 누구보다 실존적인 결단을 강하게 주장하는 신학자이다. 하지만 불트만은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한 것이라 주장한다. 불트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불트만은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했고, 이 구원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보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구원의 토대는 인간으로서는 선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만약 죄의 용서가 인간에게 구원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만약 구원의 토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불트만은 예수의 죽은 자로부터의 '육체적' 부활을 거부한다. 불트만은 빈 무덤 사건의 전승과 부활한 예수의 육체적 현현은초기 전승에 대한 후대의 장식이라고 믿는다.(New Testament and Mythology, 39쪽) 불트만은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것은 인정하지만, 이 만남이 객관적이라기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활이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듯이, 십자가의 의미에 덧붙여진 신화론적인 사건도 아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예증된 신화론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십자가 자체의 의미와 똑같은 만큼이나 신앙의 문제이다.(앞의 논문, 41쪽)
불트만은 십자가를 부활과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고, 십자가와 부활을 동일한 의미로 보면서 케리그마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는 '십자가'가 신비적이거나 신화론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이라고 인정했다.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구별했다는 것은 논쟁의 초점이다. 대체로 학자들은 신앙의 그리스도를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본다고 해석하고 불트만이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신앙의 근거로 삼는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다는 주장도 맣다. 혹은 불트만은 역사와 신앙의 문제를 푸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
1) 역사적 연속성
불트만은 예수의 사역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과 관련해 두 가지 과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시도하는 전통적인 역사비평적 연구의 범주와 연관된다. 두 번째 시도는 역사를 실존적인 연관에서 이해하는 것이다."(R. Bultman, "The Primitive Christian Kerygma and the Historical Jesus," in The Historical Jesus and the Kerygmatic Christ(New York: Abingdon Press, 1964), 27.)
"실존적 해석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분명히 전제하는 한, 실존적 해석은 역사비평적 작업을 전제한다." 이것은 불트만이 역사적 연구에 의해 비판적으로 검증된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공관복음이 예수의 일대기나 심리적 상태를 알기 위한 자료가 되지 못한다고 본다. 즉 이 자료를 객관적인 사실로 바로 받아들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공관복음이 가지고 있는 많은 예수의 말들은 선포의 목적과 의도는 시사해준다. 따라서 불트만은 자신의 모든 관심을 '예수가 의도한 것'을 찾기 위해 쏟는다. 그는 '예수가 의도한 것'을 먼저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해 찾고, 그 결과를 실존적으로 해석한다.
불트만이 역사적 예수의 선포가 이미 케리그마적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의 '역사적 연속성'은 불트만 신학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김동건, 영남신학대 교수, 불트만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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