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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8:52 / IXA427, 회개, 두 번째 회개, 루터 설교

by 엉클창 2025. 7. 17.

NB8:52 / IXA427

바리새인과 세리의 복음.[i] 루터의 설교.[ii]

루터는 하나님께서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입고 돌아갔다는 그 판결이 단순히 이성에 반한다는 것뿐 아니라, 실족을 일으킨다(forargelig). , 인간의 이성, 세속적 마음에는 반드시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옳게 지적하고 있다.[iii]

루터는 세리가 자기의 기도 속에 다음과 같이 서로 모순되는 표현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그를 찬탄한다: - 죄인 - 긍휼히 여기소서.[iv] 하지만 잘못된 점도 있다. 루터는 세리가 반드시 복음을 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도는 다윗에게서도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v]

 



[i] 누가복음 18:9-14 (개역개정)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라.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였고,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였느니라.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신학적 포인트:

바리새인은 외적 의로움(율법적 의로움)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지만, 세리는 내면 깊은 죄의식에서 우러나오는 단순한 기도로 은혜를 구합니다.

키르케고르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루터가 칭찬한 대로, 세리의 기도가 갖는 "역설적 결합"입니다: " - 죄인 - 긍휼히 여기소서" 이는 이성적으로 보자면 모순된 조합이며, 인간의 자격 없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말하는 신앙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루터는 이 기도 속에 복음(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원리)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고, 키르케고르도 그 구조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반드시 복음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는 다윗의 시편에도 이와 유사한 참회적 기도가 있음을 근거로 삼아, 깊은 실존적 회개는 복음의 전파 이전에도 일어날 수 있는 내면의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이 비유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죄의 인식, 회개의 본질, 그리고 믿음의 역설을 논할 때 매우 중요한 본문이며, 위에서 인용한 "두 번째 회개", 혹은 자기기만을 뚫고 진정으로 죄인됨을 자각한 순간의 도달과도 연결됩니다.

[ii] 출처 요약: 자료명: En christelig Postille (한글: ≪기독교적 설교집≫ 또는 ≪기독교 강해 모음집≫)

                          저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권책: 1

                          본문 위치: p. 467-482

                          설교 제목: 「삼위일체 후 열한 번째 주일 설교」 (Ellevte Søndag efter Trinitatis)

 

관련 본문 내용:

이 설교는 누가복음 18:9-14(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본문 삼아, 루터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자기 의로움의 위선, 그리고 참된 회개에 대해 강하게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루터는 특히 세리의 기도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 가 모순적 표현처럼 보이나, 바로 그 역설 속에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다고 해석합니다. 이 점이 키르케고르의 관심과도 맞닿아 있죠.

 

키르케고르의 인용과 해석에서 중요한 점:

키르케고르는 이 설교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분석합니다. 루터는 이 세리가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해석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시편의 다윗과 같은 선례를 들어 복음 전파 이전에도 실존적 회개의 언어는 존재했다고 반론합니다. 이때 키르케고르가 중시하는 것은 "-죄인-긍휼히 여김"이라는 단어 조합의 역설성입니다. 이는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실존적 절망과 신 앞에서의 완전한 낮아짐 속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죠.

[iii] 루터의 핵심 주장:

1. 이성적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의 충돌

루터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적 이성과 세상의 정의 감각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말합니다.

인용: "Her høre vi endvidere to forunderlige Domme, som løbe lige tvertimod al menneskelig Viisdom og Fornuft, ja, som ere skrækkelige for al Verden"(여기 우리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이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두 가지 놀라운 판결을 듣는다. 세상 전체에겐 오히려 소름 끼치는 것이다.)

2. 세상의 판단 기준 전복

루터는 세상적 기준에서는 '의인'처럼 보이는 바리새인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고, 반대로 '죄인'으로 보이는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인용: "de store Helgene fordømmes som uretfærdige; de arme Syndere derimod erklæres hellige og retfærdige at være."(위대한 성인들이 불의한 자로 정죄되고, 가련한 죄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자로 선포된다.)

3. 예수님의 판단은 세상 기준으로는 '실족스러운 것(forargeligt)'

키르케고르가 이 주석에서 강조하듯, 루터는 "그 판단이 너무도 이상하고, 실족스러울 정도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인용:"forunderligere er det, ja, forargeligt tillige"(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판단이 실로 실족스럽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키르케고르의 해석적 관심:

키르케고르는 이 구절을 통해 기독교 진리의 역설성과 실족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루터가 말한 'forargeligt(실족스러운)'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이해할 수 없음'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 판단에 대한 신앙의 충격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루터의 설교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복음이 인간의 이성적 기준과 얼마나 충돌하는지를 신앙의 본질로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iv] 다음은 루터의 ≪En christelig Postille≫ 제1 474쪽에 있는 설교의 인용문에 대한 한국어 번역이다. 이 부분은 누가복음 18:13의 세리의 기도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에 대한 주석으로, 루터는 이 기도 안에 진정한 복음의 역설(paradoks)이 드러난다고 본다.

 

루터 인용문 번역:

"이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런 죄인, 그런 정죄받은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니 말이다: 『하나님이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왜냐하면 죄와 은혜는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물과 불처럼 서로 대립한다. 죄가 있는 곳에서는 은혜가 머물 수 없고, 오직 진노와 형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그 둘을 결합하고 통합하는 비결을 알게 된 것일까? 어떻게 자신의 죄를 가지고도 은혜를 구하는 대담함을 얻을 수 있었는가?

이것은 단지 율법과 십계명을 아는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바리새인들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바리새인들이 알지 못한 또 다른 비결이 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한 가지의 비밀스러운 기술(Kunst)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사랑스러운 복음의 선포를 보게 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자격도 없이 정죄받은 죄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선포되고 제시되는 복음이다.

이 세리 역시 이 복음을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자각했지만, 복음을 통해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감히 기도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가련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진노와 영원한 죽음을 자신의 아들, 약속된 메시야의 공로로 거두어 가실 것이라는 복음을 그는 믿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믿음이, 그의 기도 속에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단어들 - '', '죄인',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 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었던 것이다."

 

해설: 루터는 이 짧은 기도에 다음과 같은 신학적 심오함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죄와 은혜는 본래 함께할 수 없는 개념이다 →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이 기도는 불가능하거나 오만하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고, 성령은 인간 안에 믿음을 일으키신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은혜를 간구할 수 있는 신앙의 역설 속에 들어간다.

이 구조는 키르케고르가 'forargelse(실족)' 'paradoks(역설)'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던 기독교 진리의 역설성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루터의 이 설교는 단순한 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믿음이 어떻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v] 예를 들어, 시편 25, 41 5, 51 3, 84 12, 119 29, 142 2절 등을 참조하라.

- David: 이스라엘의 왕 다윗(기원전 약 1000-960년경)을 ≪시편≫ 150편의 저자로 보는 유대교 및 기독교 전통은 오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다윗의 이름이 시편의 제목에 명시된 것은 73편뿐이다. '다윗의 시편'이라는 명칭은 루터의 성경 번역에서 사용된 이후로 등장한 것으로, 종교개혁 시대 덴마크어 성경에도 채택되었으며, 1699년부터 1802년까지 출간된 가정용 및 휴대용 성경들에서도 계속 사용되었고, 그 결과 이 명칭은 교회와 민간 전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해설:

루터는 누가복음 18장의 세리의 기도,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기도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러한 기도는 이미 구약, 특히 다윗의 시편에 자주 등장한다고 말합니다. 주석에서 언급된 시편들 중 대표적인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51:3 (개역개정)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전형적인 회개의 기도입니다.

시편 25:11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내 죄악, 곧 크나큰 죄악을 사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와 같은 구조.

루터는 이것을 바탕으로 세리가 단순히 복음을 직접적으로 듣고 회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다윗의 기도 속에 복음적 탄식과 자비 간구의 전형이 존재했음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의 비평에 따르면, 루터는 세리가 복음을 들어야만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했는데, 이는 다소 과도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forkeert" "틀리다"고 비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