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나의 매우 하찮은 역할은 단지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NB23:133, Pap. X4 A137의 주석 자료◄ “나의 매우 하찮은 역할은 단지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 – 키르케고르의 자기 인식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저술 활동을 단순한 권위적 가르침이 아니라,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at gøre opmærksom)”**으로 규정한다. 📌 참고 자료✔ 『나의 저작 활동에 관하여(Om min Forfatter-Virksomhed)』의 「정산(Regnskabet)」, 해당 문헌의 7쪽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것이 다시금 내 저작 전체의 범주이다. 즉, 종교적(religieuse)이고 기독교적(christelige)인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지만, 그러나 ‘권위 없이(uden Myndighed)’ 행하는 것이다.” (SV2 13, 528, note.. 더보기 터툴리안(Tertullian) 소개, NB23:133, Pap. X4 A137 ◄ 터툴리안(Tertullian) 소개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터툴리안(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약 160년 – 220년 이후, 또는 240년경 사망 추정) ✔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e) 출신✔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 문필가(kirkelige forfattere)’ 중 한 명✔ 본래 법률가(jurist)였으나, 195년경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음 ◼ 터툴리안과 몬타누스주의(Montanism)✔ 207년경, 그는 **몬타누스주의(Montanism)**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몬타누스주의는 2세기에 등장한 기독교 예언 운동(prophetisk bevægelse)으로, 교회의 세속화(verdsliggørelse)와 문화와의 결탁을 비판하며.. 더보기 NB23:131, Pap. X4 A135, 고난 속에서의 싸움(Den lidende Kamp) NB23:131, Pap. X4 A135고난 속에서의 싸움(Den lidende Kamp)이 싸움이 오직 하나의 기독교적 싸움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 기독교 자체(Χstdommen selv)이기 때문이다.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하여 인간을 악마의 권세에서 강제로 빼앗지 않으신다. 아니, 그리스도(Χstus)는 태어나시고, 고난받고,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악마의 권세에서 구원하신다. 불의(det Uretfærdige)조차도 그 나름의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불의가 본래 불의라는 이유로, 그 불의에 불의를 행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고난 속에서 불의가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행사하도록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이기는 것이다.기독교적 싸움의 첫인상과 실제 힘기독교적 싸움은 언뜻 보기.. 더보기 NB23:130, Pap. X4 A134이레니우스 NB23:130, Pap. X4 A134이레니우스율법과 복음의 상호 관계(Det gjensidige Forhold mellem Lov og Evangelium)공통점(Eens ere de) 1. 기원(Ophav)이 동일하다. 율법(Lov)과 복음(Evangelium)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2. 목적(Hensigt)이 동일하다. 인간의 교육(Opdragelse)을 위한 것이다. 3. 본질적인 내용(væsentlige Indhold)이 동일하다. 하나님.. 더보기 NB23:129, Pap. X4 A133이레니우스(Irenæus)의 해석 NB23:129, Pap. X4 A133이레니우스(Irenæus)의 해석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죽음(death)은 확실히 죄의 형벌(punishment of sin)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의 일부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grace)와 자비(mercy)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마(devil)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방법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응징으로 죽음을 그 사이에 개입시키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끝내셨다.만약 인간이 영원한 존재(eternal being)로 계속 살아갔거나, 죄를 지은 후에도 영원한 존재가 되었다면, 악마는 승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이 동시에 다.. 더보기 NB23:111, Pap. X 4A 114신앙과 실존 (Tro - Existens) NB23:111, Pap. X 4A 114신앙과 실존 (Tro - Existens)보통 사람들은 먼저 신앙(Troen)을 가져야 하며, 그 후에 실존(Existeren)이 따라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다. 마치 신앙이 실존 없이도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그리고 사람들은 이 생각을 깊이 내면화하여, 실존을 제거해 버렸다. 왜냐하면 신앙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매우 단순하다.“신앙을 가지려면 먼저 실존이 있어야 한다.”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실존(Existens)이 있어야 한다. 즉, 실존적 규정(existentiel Bestemmelse)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결코 충분히 강조할 수 없다.“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더보기 NB23:33, Pap. X4 A 33 이 시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Min Tilværelses Betydning i Tiden) NB23:33, Pap. X4 A 33이 시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Min Tilværelses Betydning i Tiden)교회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교리(Læren) 또한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회개(Bod)하는 것뿐이다.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Tilværelse)가 표현하는 바이다. 인간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가 가진 가장 성숙한 실존이다(fremmeligste Existents).그리고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나는 감히 나 자신을 기독교인(Christen)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교회를 개혁하거나, 그런 일에 관여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다른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 낯선.. 더보기 NB23:30, Pap. X4 A 30앞으로 다가올 일(Hvad der forestaaer) NB23:30, Pap. X4 A 30앞으로 다가올 일(Hvad der forestaaer) 중대하게 검토해야 하는 것이 “교리(Læren)”가 아니다. 개혁해야 하는 것이 “교회(Kirken)”가 아니다.아니다. 검토(revideres)해야 할 것은 ‘실존(Existentserne)’이다.우리의 실존 전체(Existentielle)가 본질적으로 난센스(Galimathias)일 수 있으며, 결국 우리 모두는 기독교(Χstd.)에 대해 끔찍한 수준의 양보(Indrømmelse)를 하게 될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우리는 이 실존적 요구(Existentielle)에 대해 움츠러든다(krympe os).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회피책(Udflugter)과 술책(Paafund)을 만들어낸다.그것이 바로 .. 더보기 이전 1 ··· 3 4 5 6 7 8 9 ··· 57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