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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3:33, Pap. X4 A 33 이 시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Min Tilværelses Betydning i Tiden) 본문
NB23:33, Pap. X4 A 33 이 시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Min Tilværelses Betydning i Tiden)
엉클창 2025. 2. 5. 08:57NB23:33, Pap. X4 A 33
이 시대에서 나의 존재의 의미(Min Tilværelses Betydning i Tiden)
교회는 개혁되는 것이 아니다.
교리(Læren) 또한 개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회개(Bod)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존재(Tilværelse)가 표현하는 바이다.
인간적으로 말해, 나는 우리가 가진 가장 성숙한 실존이다(fremmeligste Existents).
그리고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나는 감히 나 자신을 기독교인(Christen)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교회를 개혁하거나, 그런 일에 관여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다른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 낯선 나라의 풍습과 관습에 대한 소식을 가져오듯, 나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이상(Idealer)과 교류하며 마치 외국에서 살아온 것과 같았다.
그곳은 겸손하고 소박하기만 하면, 온통 온유함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너무나도 평온한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 그들은 마치 이렇게 내게 말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가라(Gå nu med Gud).”*
“네가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이상을 시적으로 네 안에 간직하라.”
“네가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네게 달려 있다. 하지만 기억하라. 너는 그에 대해 책임이 있다.”
*여백에서: 네가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높고 숭고한 일이기에, 감히 나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나는 이상을 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현재 존재하는 교리(Læren)와 제도(Indretningerne)는 매우 훌륭하다. 오, 그러나 우리의 실존(Existentserne), 우리의 삶이 문제이다. 나를 믿으라, 그것은 보잘것없다(maaedeligt). 그러나 이것이 인정된다면 용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독교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를 개혁하려 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죄를 더하는 것이다.
** 여백에서; 교리의 선포(Forkyndelsen af Læren)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기독교는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실존은 교리와 거의 닿아 있지 않다.
루터가 성경 한 권을 들고 과거 황제 앞에 나아갔듯이, 나 또한 오직 신약성경(N.T.)을 들고 나아갈 수도 있다.[i] 그리고 가장 단순한 기독교적 삶의 원칙을 택해, 각 사람에게 묻겠다.
“너는 이것을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실천한 적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네가 교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백에서; 그리고 아무도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선하다.” 그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비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 나는 이미 이것도 예상하고 대비했다. 사람들은 나를 실컷 비웃을 기회를 얻었고, 나는 그것을 스스로 원했다.[ii] 이제 사람들은 그것에 질려 있지 않은가?
“멈춰라! 오, 멈춰라! 적어도 내가 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라.”
나는 무엇을 줄 수 있는가? 나는 시인(Digter), 오, 그저 시인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의 영광 속에서 기독교를 묘사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해왔다. 그러니 적어도 기독교를 개혁하기 위해 투표하기 전에, 내 말을 들어보라. 기독교가 얼마나 이상적인지를 먼저 보라. 그리고 그다음에 개혁을 논하라.
나는 오직 시인일 뿐이다, 오, 시인일 뿐이다.
“내 삶을 보지 말라.”
“그러나 동시에 내 삶을 보라.”
왜냐하면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기독교인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말하는 이상(Idealet)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 “내 개인이야 어찌되든 상관없다.”
나는 단지 시인일 뿐이지만, 나는 이 땅의 삶을 너무도 사랑하며, 편안한 삶을 살고 싶고, 즐기고 싶고, 인생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오, 나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초라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러한 상태에서도 기독교가 나에게 허락된 것임을 이해한다.
“나는 아이가 아버지나 스승에게 묻듯이, 늘 나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나는 기독교를 선포할 수 있다. 그러니 기독교를 개혁하려 하기 전에, 나의 말을 들어라.
나는 시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내일도 내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나는 오직 어제까지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디든 기독교에 위협이 되는 움직임이 있다면, 나는 그곳으로 가는 것 같다.
나는 군중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혼잣말을 하듯이 이야기한다. 나는 단지 이상(Idealerne)에 대해 말할 뿐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은 투표로 기독교를 바꾸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Idealet)에 대한 나의 말을 듣고, 점차 마음속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말이 어떤 틈새로든 스며들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사람은 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혼자 조용히 집에 있을 수도 있고, 외롭고 긴 산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기독교를 개혁하려고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투표를 통해 기독교를 개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겠다”라고 선언하고, 그것을 “기독교(Χstd.)”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오,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내 말을 들어라!”
“이보다 더 온화한 말은 듣지 못할 것이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단지 시인일 뿐이지만, 나는 진정한 진리의 증인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줄 수 있다.
“진정한 진리의 증인(Sandheds-Vidne)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보라!”
“진정한 사도(Apostel)란 어떤 존재인가? 감히 교회를 개혁하려는 자라면, 적어도 진리의 증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나를 보라. 나는 단지 시인일 뿐이다.
그러니 진정한 진리의 증인과 비교해 보라. 그때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나는 단지 시인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개혁되기 전에, 기독교의 이상을 먼저 보라!
[i] https://praus.tistory.com/443을 참고하라.
[ii] 이 표현은 키르케고르가 자신이 의도적으로 조롱받기를 원했던 사건을 가리킨다. 이는 특히 그가 『Fædrelandet』 신문에 기고한 두 개의 기사와 관련이 있다.
1. 「떠돌이 미학자의 활동, 그리고 그가 어떻게 결국 연회 비용을 지불하게 되었는가」
(En omreisende Æsthetikers Virksomhed, og hvorledes han dog kom til at betale Gjæstebudet)
작성자: 필명 Frater Taciturnus (과묵한 형제)
발행: 『Fædrelandet』, 1845년 12월 27일, 기사 번호 2078
내용: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당시 덴마크 신문 『Corsaren』(풍자 신문)에 의해 조롱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며, ** "나는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나는 『Corsaren』이 덴마크에서 유일하게 나만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그들의 풍자 속에 포함되기를 원한다."
즉, 키르케고르는 『Corsaren』이 자신을 단순히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작가들과 동일하게 조롱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2. 「문학적 경찰 업무의 변증법적 결과」(Det dialektiske Resultat af en literair Politi-Forretning)
작성자: 필명 Frater Taciturnus
발행: 『Fædrelandet』, 1846년 1월 10일, 기사 번호 9
내용: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공개적으로 조롱받기를 원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직접 조롱당하기를 요청한 것'이다." 즉, 그는 단순히 개인적인 이유로 풍자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문학과 철학적 논쟁의 정당성을 위해 스스로 조롱받기를 원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요약 - "나는 풍자를 원했다"
키르케고르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조롱당하기를 원했고, 그 요청을 『Fædrelandet』 신문에서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당시 『Corsaren』이라는 풍자 신문이 다른 작가들을 조롱하면서도 자신만은 공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그는 **"내가 덴마크에서 유일하게 풍자받지 않는 작가라는 사실이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나도 조롱받아야 한다!"**고 요청했고, 결국 그 후 『Corsaren』은 키르케고르를 강하게 풍자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그 후 그는 덴마크 대중들에게 더욱 강하게 비판받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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