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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23:131, Pap. X4 A135, 고난 속에서의 싸움(Den lidende Kamp)

엉클창 2025. 2. 5. 23:04

NB23:131, Pap. X4 A135

고난 속에서의 싸움(Den lidende Kamp)

이 싸움이 오직 하나의 기독교적 싸움임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 기독교 자체(Χstdommen selv)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폭력을 사용하여 인간을 악마의 권세에서 강제로 빼앗지 않으신다. 아니, 그리스도(Χstus)는 태어나시고, 고난받고,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악마의 권세에서 구원하신다. 불의(det Uretfærdige)조차도 그 나름의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불의가 본래 불의라는 이유로, 그 불의에 불의를 행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고난 속에서 불의가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행사하도록 허용하면서도, 그것을 이기는 것이다.


기독교적 싸움의 첫인상과 실제 힘

기독교적 싸움은 언뜻 보기에는 항상 실망스럽다. 고난 속에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도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불의한 통치자들은 처음에 이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사람은 위험하지 않군. 그는 힘을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를 대적하려는 그 어떤 힘이 나타나도 그것을 거부한다. 설사 그 힘이 그의 편을 들려 한다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싸움은 단순한 사적인 즐거움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아, 너는 너무나도 근시안적이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만약 네가 그를 유혹하여 폭력을 사용하게 만들 수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덜 위험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순간적으로는 위험이 더 커질 수도 있었겠지만, 고난 속에서 싸우는 자가 만들어 내는 몰락은 훨씬 더 철저하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고난 속에서 싸운다는 것의 의미

그렇다면, 고난 속에서 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곧 그 자신이 변하여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로 인해 네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된다. 그는 너에게 단 하나의 부당함(Uret)도 행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는 오히려 네가 저지른 모든 부당함을 극한까지 드러나게 만든다.

 

세속화된 세계와 망각된 기독교적 전술

그러나 세상과 기독교 세계(Χstheden)는 이미 세속성(Verdslighed)에 깊이 빠져버렸다. 그 결과, 이러한 싸움의 방식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이제, 이런 방식의 싸움은 오로지 완전한 광기(Galskab)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광기인가?

존재(Tilværelsen)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 광기인가? 모든 순간, 모든 지점에서 정의(Retfærdighed)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광기인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믿는 것이 광기인가? 그리고, 단 한 사람이 진리 안에 있다면, 그리고 그가 진리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수백만 명보다 강하다고 믿는 것이 광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