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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 VIII2 B 35:2 n.d., 1847, 사랑에 대하여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Pap. VIII2 B 35:2 n.d., 1847, 사랑에 대하여

엉클창 2024. 4. 1. 17:31

 

. . . . 애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애인의 소원대로 어떤 사랑을 포기하는 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관계의 예이다.* 즉,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장 높은 분이 아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배제되고, 애인의 소원이 결정이다. 그러나 미혹되어 하나님을 망각한 애인이 사랑받고자 하는 유일한 소원, 사랑받는 것이 애인의 유일한 소원인데, 이 애인을 사랑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것,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지 않으려는 것, 애인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빼앗지 않으려는 것,―애인을 사랑하기에―애인과 애인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소원인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애인을 미워하고, 자기 자신도 미워하여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길을 가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의 한 예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기독교이다. 즉,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한하게 모든 희생을 다해서 상대방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여백에서: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보상으로 애인에게 사랑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수하게 인간적 관계의 표시이다. 왜냐하면 그가 애인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여백에서: **애인, 친구, 사랑하는 이들, 현대인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다 한 후에 보상으로 그들에게 사랑받는다면, 이것은 단지 인간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발견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그러나 애인, 친구, 사랑하는 이들, 현대인에게 모든 희생을 하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사랑이다. 그의 사랑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사도가 말한 그 율법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위험을 기꺼이 감행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단 한 명의 유일한 사랑의 존재가 된다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에게 이런 경고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그가 더욱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 더 속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만이 해결책을 알고 있다. 그가 희생을 하고 그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애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거부한다면, 당신이 사랑받는 자가 된다면 당신은 당연히 그들에게 더욱더 해로운 유일한 존재가 된다. 기독교는 해결책을 알고 있다. 당신이 희생하면 당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주의: [연필로] 율법이 요구하는 내면성에 대한 것인 다음 섹션에서 사용될 수 있음―Pap. VIII2 B 35:2 n.d., 18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