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우스

DD:9, Pap. II A 91 슐라이어마허, 범신론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DD:9, Pap. II A 91 슐라이어마허, 범신론

엉클창 2024. 10. 11. 14:50

저널 DD로 돌아가기: https://praus.tistory.com/50

 

DD:8, Pap. II A 91

범신론이 종교 속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하나의 순간에 불과하다는 점이 이제는 인정되고 있으며,[i] 따라서 종교를 범신론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정의한 슐라이어마허[ii]의 오류도 드러난다. 그는 보편적인 것과 유한한 것의 초시간적인 융합의 순간[iii]을 종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iv]

 

 

At Pantheismen udgjør et overvundet Moment i Religion, er Grundlag for den, synes nu at blive anerkjendt og herved tillige   Feilen i 👤Schleiermachers Definition paa Religion som forblivende i Pantheismen, idet han gjør hiint udenfor Tiden liggende Sammensmelte[l]ses-Moment af det Universelle og det Endelige til Religion.



[i] 다음을 참고하라. J. E. Erdmannsarticle Pantheismus die Grundlage der Religion in Zeitschrift für spekulative Theologie, vol. 1, no. 2, p. 142: “범신론은 모든 종교의 기초이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이유로 더 이상 어떤 종교도 범신론이 아니며, 오히려 종교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범신론은 이미 어느 정도 하위 개념이 되어 그 안에서 부정되고 있다.…따라서 종교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범신론은 단순한 근거가 되었으며, 즉 극복되었다.

[ii]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독일 신학자, 종교 철학자, 고전 문헌학자, 1796년 베를린에서 목사 안수, 1804년 할레인 대학 특임 교수, 181년 베를린 대학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초기 저서인 『종교에 대하여』(1799)에서 종교를 우주에 대한 직관과 느낌, 즉 유한에서 무한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종교를 형이상학이나 윤리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의 교리서인 <그리스도교 교리>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의 정의에서 직관을 배제한다. 여기서 직관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느끼는 권위에 대한 가장 분명한 표현이 ‘신’이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직관은 분명한 형태로 신에 대한 즉각적인 의식으로 나타나며, 그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 하나님의 교리로서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의 표현을 위한 일종의 언어 교리인 신앙의 증언을 명확한 교리적 표현으로 제공하는 것이 교의학의 임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전통적인 개신교 교리와 헤겔의 사변적 교리 모두에서 자신을 분명히 구별한다. 그는 학교를 설립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에 교의학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iii]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슐라이어마허의 개신교 원리에 따른 기독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ä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 3(1835-36)의 § 8,2을 참고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신앙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첫 번째 판은 1821-22년에 베를린에서 출판되었지만, 1830년에 개정된 두 번째 판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3판은 2판과 내용이 동일하다); 1, 44-46쪽에 있다.

[iv] 다음을 참고하라. J. E. Erdmanns article Pantheismus die Grundlage der Religion in Zeitschrift für spekulative Theologie, vol. 1, no. 2, p. 143

“우리는 신에 대한 절대적 의존의 교리를 범신론의(주관적) 관점으로 지칭했다. 이 관점을 종교적 관점으로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슐라이어마허는 주체가 최소한의 자기 활동을 하면서도 잠시 동안 신과 대면하도록 허용한다(그리고 여기에서 의존의 느낌을 도출한다). 따라서 더 이상 일관된 범신론은 없지만 약간만이라도 그 자체를 넘어섰다. 슐라이어마허가 주체의 자기 활동이 나오는 윤리적 종교로 이동하자마자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러한 입장을 고려할 때, 슐라이어마허의 입장이 내부적으로 모순적이라는 비판, 즉 너무 범신론적이면서도 충분히 범신론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제시할 수 있다. 그가 그의 교리(Glaubenslehre)의 도입부에서 설정한 종교의 기초가 더 이상 순수한 범신론이 아니라 이미 이원성, 즉 감정과 신성의 대립이라는 의미에서 충분히 범신론적이지 않다. 그러나 범신론이 그의 작품의 기초에 남아 있지 않고 오히려 종교의 발전에서 제기(고개를 든다)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너무 범신론적이며, 따라서 감정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의존성이 여전히 절대적이기 때문에 종교 자체에는 너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