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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무신론적 실존주의 그리고 삶의 의미, 키르케고르의 생성과 헤겔의 역사발전의 차이 본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삶의 본질적인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우주나 신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며, 인간은 미리 정해진 목적이나 본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인 의미는 없다고 보지만, 인간은 자신의 자유와 책임을 통해 주관적인 의미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며,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각자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삶의 의미에 대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지만, 그의 관점은 더 급진적이고 독창적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통해,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와 도덕이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신에 의존하던 절대적 의미와 도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이러한 상황을 “니힐리즘”이라고 불렀으며,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진 의미에 의존할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니체는 단순히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한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초인(Übermensch) 개념을 제안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처럼 창조해야 하며, 외부의 절대적인 기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즉, 삶의 의미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의지와 창조성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니체는 또한 영원회귀(Ewige Wiederkehr)라는 사상을 통해, 동일한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가정 하에, 현재의 삶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는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대신, 자신의 삶을 완전하게 긍정하는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삶에 고정된 의미는 없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보다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빅터프랭클과 니체
빅터 프랭클과 니체는 모두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유했지만, 그 접근 방식은 매우 다르다. 니체를 미쳤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두 철학자의 생각을 비교해 보면 오히려 그들 사이에 흥미로운 연결점도 있다.
빅터 프랭클: 의미를 찾는 존재로서의 인간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의미 치료를 제안하며, 인간이 삶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동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강제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사람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생존과 심리적 건강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프랭클은 삶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일지라도,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태도와 그 상황에서 발견한 의미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니체: 의미 창조자로서의 인간
니체는 본질적으로 프랭클과 비슷한 점을 강조한다. 니체도 인간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 방식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는 전통적, 종교적, 사회적 의미 체계가 붕괴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체계의 해체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니체는 초인(Übermensch) 개념을 통해,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절대적 기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프랭클의 “삶의 의미 찾기”와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인간이 능동적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니체의 “광기”
니체는 생애 말년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서 실제로 병을 앓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 자체를 “미쳤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그의 철학은 인간이 전통적인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급진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그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나 “영원회귀” 사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으며, 인간 존재와 의미에 대한 극단적 질문을 던졌다.
프랭클과 니체의 공통점과 차이점
프랭클은 인간이 삶의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고 했고, 니체는 삶의 고통과 혼란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랭클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더 강조했다면, 니체는 의미를 새롭게 만드는 측면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철학자는 다르게 접근했지만, 결국 인간이 의미 없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능동적으로 삶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따라서 니체의 사상이 과격하거나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미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인 가치관을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시도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반응일 수 있다. 니체는 단순히 절망하거나 무의미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삶의 혼란 속에서 더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고자 한 혁명적 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의미의 발견과 창조의 문제
삶의 의미가 창조되는 것인지 아니면 발견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철학과 심리학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이다. 이를 탐구한 사상가들은 각각 다른 관점을 제시해 왔으며, 사실 어느 한쪽으로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1. 의미는 발견되는 것인가?
빅터 프랭클과 같은 사상가는 의미를 발견하는 쪽에 더 가깝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는 인생의 모든 상황, 특히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특정한 의미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이 삶 속에서 고유한 목적이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그 사람의 고유한 소명이나 역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랭클에 따르면,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각 사람은 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개인적인 여정을 걸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의미는 이미 주어진 세계나 상황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를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2. 의미는 창조되는 것인가?
반면, 프리드리히 니체는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통해 기존의 모든 가치 체계가 붕괴된 상황을 진단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은 외부의 가치나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처럼 창조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즉, 의미는 외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3. 절충적 관점: 창조와 발견의 혼합
의미는 단순히 발견되거나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두 요소가 혼합된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인간이 상황 속에서 의미의 단서를 발견한 후 이를 토대로 자신의 독창적인 의미를 만들어 나간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삶에서 마주치는 여러 경험, 관계, 직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을 발견하지만, 그 발견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에 들어간다. 이 관점에서는 의미가 어느 정도는 환경이나 상황에 의해 제시되지만, 개인이 이를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킬 여지를 남겨둔다.
4. 결론: 발견과 창조의 이중성
삶의 의미는 발견과 창조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발견한 단서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의미는 어떤 경우에는 발견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창조되며, 결국 이 두 가지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미가 형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발견과 창조의 혼합의 문제
발견과 창조의 혼합이 타협이나 타락처럼 느껴질 수 있다. 발견과 창조의 혼합은 자칫 절충으로 보이기 쉬운데, 이것이 양쪽의 날카로운 면을 무디게 하는 ‘맹탕’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관점에서 좀 더 철저하게 따져보면, 의미가 오로지 발견이거나 오로지 창조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타협 없는 입장을 유지하는 길일 수 있다.
순수한 의미 발견론의 입장
의미가 오로지 발견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세계와 우주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인간은 이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입장은 객관적 진리와 같은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의미는 우리의 인식이나 행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플라톤적 실재론에서의 ‘이데아’는 우리 인식 밖에 존재하는 절대적 진리를 의미하며, 발견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창조할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의 역할이 이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그친다면, 삶은 객관적인 목적과 방향을 가진다. 우리는 이 길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자신의 해석이나 개입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수동적인 자세가 요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삶이란 이미 완성된 책을 읽어 나가는 것처럼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계가 있다.
순수한 의미 창조론의 입장
반면에, 의미가 오로지 창조되는 것이라면, 삶의 의미는 개인의 의지, 창조성, 선택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형성된다. 니체의 초인 사상에서처럼, 의미는 절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가 규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인간은 더 이상 발견자가 아니라 창조자로서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순수 창조론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창조적 부담을 지운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생각은 엄청난 자유를 주는 동시에, 무한한 불안과 책임감을 동반한다. 의미의 주관화로 인해, 각각의 의미는 상대적이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니힐리즘에 빠질 위험도 있다.
창조와 발견의 혼합이 정말 타락인가?
혼합이 맹탕이나 타락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이 두 입장이 서로 긴장 속에서 유지되지 못하고, 적당히 타협하는 모양새로 여겨질 때일 것이다. 그러나 혼합을 단순한 절충이 아니라, 이 둘을 동시에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양면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의미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능동적으로 의미를 재구성하거나 재해석해야 하는 존재라는 관점이다.
프랭클의 경우에도 ‘발견’이라는 용어를 쓰긴 했지만,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가 찾은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능동적으로 의미를 새롭게 형성해 나갔다는 점에서, 오히려 창조에 가까운 방식으로 살아냈다고 볼 수 있다.
결론: 발견과 창조의 긴장 관계로서의 의미
혼합이 타락이나 맹탕이 되지 않으려면, 의미를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발견과 창조가 팽팽한 긴장 속에 공존해야 할 것이다. 의미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도, 인간이 고유하게 창조해가는 과정도 포함할 수 있다.
이 긴장 속에서 인간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의미를 발견하거나 무한한 자유 속에서 무한히 창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어진 의미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된다.
만약 발견과 창조의 종합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헤겔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과 같은 느낌이 든다. 발견은 필연적인 범주인 것이고, 창조는 자유의 범주인 것처럼 보인다. 발견과 창조의 종합을 헤겔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으로 이해한다면, 발견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필연적인 의미 요소를 인정하는 것이고, 창조는 인간이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헤겔은 자유와 필연을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통일되는 과정으로 보았고, 개인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필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발견과 창조도 단순히 절충이 아니라, 발견의 필연적 요소를 수용하면서 이를 자유의지로 재구성하는 종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삶의 의미가 발견과 창조의 종합이라면, 이는 단순한 타협이 아닌 필연성을 바탕으로 한 자유의 발현 과정이며, 개별 존재가 보편적 의미 속에서 자유롭게 자아를 구성해 가는 헤겔식 변증법적 통합에 가까운 접근일 것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헤겔의 이런 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종합적 사유를 비판한 이유는 인간 존재의 개별성과 주체성을 무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헤겔은 보편적 이성을 통한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대립된 개념들이 궁극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키르케고르는 이 접근이 인간 실존의 고유한 불안, 선택, 고뇌를 간과한다고 보았다.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체계가 개인적 실존의 고유한 경험과 내면적 투쟁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헤겔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은 개인이 사회나 보편적 질서 안에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자유는 보편적 질서 속에서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고독과 신 앞에서 개인이 스스로 결단하는 선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특히 키르케고르는 신앙의 영역에서 이러한 점을 강조했다. 헤겔의 체계에서는 신앙조차도 이성적 통합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반면, 키르케고르에게 신앙은 그 자체로 모순과 역설을 포함한 비합리적인 점프와 같았다. 이는 개별적 인간이 어떤 보편적 논리나 체계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주체적 진리를 찾는 과정이며, 헤겔의 체계가 포괄하지 못하는 부분이었다.
결국, 키르케고르는 보편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헤겔식 사유가 인간 실존의 고유성을 희석하고, 개별적 주체의 절대적 결단을 무시한다고 보아 이를 비판한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더 깊은 수준에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에 대한 지적과 관련이 있다. 특히 그가 《철학의 부스러기》(Philosophical Fragments)에서 논의하는 것은 헤겔의 사유가 본질(필연성)을 가능성의 범주에서 다룬다는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
범주 오류의 핵심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가 존재와 본질을 가능성과 실제라는 범주로 분석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헤겔에게 본질(필연)은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간주된다. 그는 모든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하여 필연적인 것이 궁극적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것이 범주를 혼동하는 오류라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에게 본질은 헤겔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 안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가능성이 아니다. 오히려 본질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현재성을 가지며,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실존 안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해야 하는 절대적인 상황이다. 하지만 헤겔은 본질을 가능성의 범주에서 다루어, 마치 본질이 시간 속에서 차츰 드러나는 과정인 양 설명한다고 비판한다.
필연성과 가능성의 혼동
키르케고르가 헤겔의 사고를 범주 오류로 보는 이유는, 필연적 본질을 마치 시간적 과정의 산물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헤겔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발전하고 종합된다고 보았지만, 키르케고르는 개별적 인간이 필연적인 본질을 ‘지금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순간을 중시했다. 본질은 어떤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신앙의 결단으로 설명한다. 신앙은 시간적 과정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가 단번에 맞닥뜨리는 비합리적 선택이다. 이 절대적 결단의 순간은 가능성의 범주에서 논할 수 없는 본질적 사건이며, 이는 헤겔이 주장하는 점진적이고 합리적 통합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철학의 부스러기에서의 비판
《철학의 부스러기》에서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역사적 종합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범주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며, 이를 ‘본질’과 ‘가능성’의 혼동으로 지적한다. 그는 인간 실존의 본질적 경험은 역사의 진행이나 논리적 종합에 따라 설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시간을 초월한 절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비판은 단순히 헤겔 체계의 추상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가 본질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즉, 필연적인 본질을 가능성의 범주로 다루는 헤겔의 사고가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러한 오류가 결국 인간 실존의 핵심적 경험을 왜곡한다고 본 것이다.
철학의 부스러기의 생성에 대하여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비존재도, 존재도 아닌 생성” 개념은 그의 실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개념 중 하나이다. 이는 인간이 단순히 존재하는(being)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non-being) 가능성 속에만 있지도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키르케고르는 이 개념을 통해 인간의 실존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동적 과정임을 설명하려고 했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의 생성
“생성”(becoming)은 키르케고르 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인간은 단순히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존재이다. 이 과정은 마치 ‘생성’처럼 설명되며, 이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단순한 시간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생성은 결단과 선택을 통해 실존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는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범주에서 벗어나, “생성”(becoming)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개인의 실존적 가능성과 선택의 자유를 강조한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지금 존재하는 것에 안주하지 않으며, 또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 속에서 무한히 방황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대신, 인간은 현재와 가능성 사이에서 스스로를 형성해 나가는 실존적 주체로서 존재한다.
존재와 비존재의 종합이 아닌, 초월적 결단
헤겔식 변증법에서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대립이 결국 종합을 통해 해결된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이런 종합적 해결을 거부하고, 대신 인간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스스로의 실존을 구성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는 헤겔식 논리에서 필연적으로 종합되어야 할 대립적 요소들이 아니라, 항상 분리된 채로 남아 있으며, 인간이 매 순간 결단을 통해 이 사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에게서 생성이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결단적 순간에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 행위는 기존의 존재 상태를 넘어서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형성해 나가지만, 그 과정은 절대적으로 개별적이고 주체적이다.
생성의 역설: 끊임없는 결단의 요구
키르케고르의 생성 개념은 단순히 발전하거나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결단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생성의 과정은 긴장과 불안을 동반한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이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과 이미 존재하는 것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지 선택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다. 이 선택이야말로 인간의 진정한 실존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신앙과 생성
이러한 생성의 개념은 키르케고르의 신앙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신앙은 단순히 존재하거나(being) 비존재(non-being)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새롭게 생성되는 과정이다. 신앙의 결단은 논리적 과정이나 이성적 합리화로 설명되지 않으며, 이는 “비합리적 점프”로서,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
결론적으로, 키르케고르의 “비존재도, 존재도 아닌 생성” 개념은 인간 실존의 동적, 결단적 측면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실존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을 통해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헤겔적 종합과 달리, 매 순간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생성의 과정이며, 이러한 생성의 개념은 실존적 불안과 자유의 본질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작용한다.
불안은 이런 생성 과정에서 느끼는 어떤 기분이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에서 불안은 바로 생성 이전에 느끼는 분위기나 기분과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자유와 가능성을 마주하는 순간에 경험하는 필연적 상태로 보았다. 이는 인간이 자유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 즉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서 자신의 실존을 결정하기 직전의 전조 같은 감정이다.
불안과 자유
키르케고르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불안(Angst)이 자유의 필연적인 동반자라는 것이다. 불안은 자유로부터 발생한다. 즉, 인간이 무수한 가능성 앞에서 어떻게 선택할지 결단해야 할 때, 그 자유의 무게가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의 현기증”으로 설명하며, 인간이 그 가능성에 직면할 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불안감을 느낀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을지 말지 선택의 순간을 앞둔 상태에서 느낀 불안은, 그가 자유의 무게를 감지한 결과이다. 이 불안은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존재가 결정될 수 있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불안: 생성의 전조
따라서 불안은 생성이 일어나기 직전의 “분위기”나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릴지 모르는 미결정 상태에 놓여 있다. 이때 불안은 바로 그 무한한 가능성과 책임을 반영하는 내면적 상태이다. 이 불안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오는 감정이다.
불안의 창조적 기능
키르케고르에게 불안은 단순한 부정적 기분이 아니라, 생성의 전조로서 긍정적 역할을 한다. 인간이 불안을 느끼는 순간, 그는 단순히 고정된 존재로서 머물러 있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실존을 형성할 기회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은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과 자유를 깨닫고, 그 자유를 통해 새로운 결단과 창조적 선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이다.
결론적으로, 불안은 생성 이전에 느끼는 기분으로서, 인간이 무수한 가능성과 자유 앞에 서 있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이는 실존적 자유가 주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비롯된 감정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선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창조적이고 필연적인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성과 역사적 발전과정의 차이
키르케고르의 생성 개념과 역사적 발전 과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키르케고르가 비판한 헤겔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비교하면 차이점이 더 명확해진다. 헤겔의 역사적 발전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논리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시간 속에서 진보와 종합을 통해 역사가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사상이다. 반면, 키르케고르의 생성은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실존적 과정으로, 보편적 역사적 법칙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1. 보편적 역사 vs. 개인적 실존
• 헤겔의 역사적 발전: 헤겔은 역사를 절대정신이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의 변증법적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는 필연적으로 대립을 통합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종합을 이루며 발전한다. 역사는 논리적인 필연성에 의해 이끌리며, 그 안에 보편적 법칙이 있다. 즉, 개인은 역사 속에서 그 보편적 법칙의 일부로 기능하는 존재이며, 개인의 자유나 선택은 이 거대한 흐름 안에서 하위적 위치에 있다.
• 키르케고르의 생성: 반면, 키르케고르의 생성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실존적 과정이다. 그는 헤겔의 보편적인 역사적 발전 개념을 비판하며, 인간 실존의 진정한 의미는 보편적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생성은 개별자가 자신의 실존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어떤 역사적 필연성이나 논리적 법칙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키르케고르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자의 실존적 진리이지, 보편적인 역사적 법칙이 아니다.
2. 필연성 vs. 자유
• 헤겔: 헤겔에게 역사 발전은 필연성의 산물이다. 역사적 과정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종합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모든 대립(정반합)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보편적 체계 속에서 통합되며, 이러한 과정은 역사 속에서 필연적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보편적 정신의 부분적 실현이며, 결국 전체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 키르케고르: 반면, 키르케고르는 자유와 개인의 절대적 결단을 중시한다. 그의 생성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실존을 형성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다. 이 선택은 역사나 논리적 과정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서 개인적으로 내려지는 절대적 결단이다. 즉, 키르케고르의 생성은 어떤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비결정성 속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비논리적이고 실존적인 사건이다.
3. 시간적 진보 vs. 순간적 결단
• 헤겔의 역사 발전: 헤겔에게 역사는 시간적 진보를 통해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는 시간 속에서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각 단계는 이전의 단계에 의해 설명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역사 속 사건들은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필연적인 논리적 과정으로 전개된다.
• 키르케고르의 생성: 키르케고르는 이런 시간적 진보의 개념을 부정한다. 그는 “순간”(the moment)을 중시하며, 생성은 시간을 초월하는 결단의 순간에서 일어난다고 본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은 연속적인 시간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한순간의 선택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는 과거의 논리적 인과관계에 구속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절대적인 현재성을 지닌다. 즉, 생성은 시간이 축적된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4. 보편적 목적 vs. 개별적 목표
• 헤겔: 헤겔의 역사 발전은 보편적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역사는 궁극적으로 절대정신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모든 역사의 과정은 이 목적을 위한 필연적인 단계이다.
•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의 생성은 개별적 목표에 중점을 둔다. 인간 실존의 목적은 보편적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실존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에 따라 다르다. 각자의 목표는 오직 그 자신만이 결단할 수 있으며, 이는 역사적 과정과는 무관한 고유한 실존적 과제이다.
결론: 생성과 역사적 발전의 근본적 차이
따라서 키르케고르의 생성과 헤겔의 역사적 발전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헤겔의 역사적 발전은 보편적 법칙과 필연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정인 반면, 키르케고르의 생성은 개별자의 실존적 자유와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주체적이고 비필연적인 과정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이 역사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절대적 결단을 통해 새롭게 생성된다고 보았으며, 이는 헤겔의 역사철학과는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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