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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NB2: 37, Pap. VIII1 A 145, (JP,1:305, 1847) 본문
그리스도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삶은 이 땅의 목표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아무에게도 실족을 줄 수 없다.) 아마도 여기서 너무나 명백한 세상의 악에 대한 증거를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리하여 그렇게 정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요,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핑계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사람들은 결단을 내리지 않고, 결단을 내릴 때까지 기다리는 모든 헛소리의 의미를 알게 된다. 전자는 하나님을 유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을 유혹하는 긴 시도 중 하나였을까?)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이 둘 다이다.
그리스도가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 원한 것은 그가 죽음을 추구하거나 유대인들에게 그를 죽이도록 강요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려는 의지(원함, willingness)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그 정도로 악하다는 것, 그분이 죄인이나 평범한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거룩한 사람은 죽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것과 변덕스러운 것에 그들의 삶을 기초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들의 삶은 더욱 진보한다. “어쩌면 나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죠. 어쩌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요.” 얼마나 어리석은가.
당신이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추측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정한 존재 조건은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으니까. 당신이 무조건적으로 선을 위해 모든 모험을 감행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박해를 받을 것이다. tertium non datur. 타협하고 싶다면, 당신의 삶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보의 변덕을 닮게 될 것이다. 당신은 위대해질 가능성이 있지만, 그 반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혜로운 모든 제사장인 당신들은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실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관점을 누락하고 폐지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은 세속적인 지혜와 부르주아-필리스틴 복음이며, 특히 복권을 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두 가지 요인의 결과이다. 즉 유대인들의 죄(guilt)와 더 큰 세계의 인정되는 악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되신 하나님(God-man)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유대인들이 우연히 타락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임을 의미할 수 없을 뿐더러, 더 과감히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이렇게 오신 것이 불행한 순간에 일어난 일일 수 없다.
아니, 그리스도의 운명은 영원한 운명이며, 인류의 특정한 중력을 나타내듯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운명은 어느 시대에나 똑같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우연한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격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적절한 일이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아마도 그러한 너무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로 인해 위축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속적인 이익이 우리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거리-신학
Seldom is the attempt made truly to understand how Christ (whose life in a certain sense could not possibly have given offense to anyone, as it had no earthly goal) came to be crucified. There is, perhaps, a fear of becoming acquainted with the evidence of the world’s evil that is so apparent here. So a pretense is made that it
was Christ himself, and God’s Governance, that ordained it so. (Here one comes to know the meaning of all the nonsense about not venturing out with decisions, but waiting until they come to one, because the former is to tempt God. Might the life of Christ, then, have been one long attempt to tempt God?) But no doubt it is both.
That Christ was willing to sacrifice his life by no means implies that he sought death or forced the Jews to kill him. Christ’s willingness to sacrifice his life simply contains an understanding of the world: that it was so evil, that the unconditionally Holy had to die—unless he wanted to become a sinner or a mediocrity—in order to be a success in the world. But it is unbelievable how little people have any notion of a decisive view of existence. They base their lives on nonsense and caprice. They go forth in life saying: Perhaps I will become something great, perhaps I will be a nobody, perhaps I will even be persecuted. What foolishness.
If you would simply take the trouble to choose, you would not need to guess; the specific conditions of existence may be reckoned with precision. If you venture everything, unconditionally, for the good—then you will be persecuted, unconditionally persecuted, tertium non datur. If you want to compromise, well, then your life will, without doubt, come to resemble the whims of a fool; for then it is possible that you will attain greatness, but the opposite is also possible.
And for this reason all you wise priests ought rather say candidly: We have omitted and abolished the most important view of existence; what we preach is worldly wisdom and a bourgeois-philistine gospel, particularly inspiring to those who play the lottery. The death of Christ is the result of two factors—the guilt of the Jews item the acknowledged evil of the larger world. Because Christ was the God-man, the significance of his crucifixion cannot be that the Jews of that period happened to be demoralized and that Christ’s coming thus took place, if I may venture to put it so, at an awkward moment.
No, the fate of Christ is an eternal one, indicating as it does the specific gravity of the hum. race; Christ’s fate would be the same in any age. Christ can never express anything accidental. So showing how the Jews could become so enraged would be an appropriate task, but, as has been said, we shrink from it, fearing perhaps to learn too much, such as, e.g., that our own worldly advantages could become evidence against us.
Distance-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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