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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2:136, Pap. VIII1 A 250, JP 5:6043 본문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NB2:136, Pap. VIII1 A 250, JP 5:6043

엉클창 2023. 5. 2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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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그럼 이제 결정되었다. 나는 집에 있을 것이다. 내일 원고를 인쇄소에 가져갈 것이다.―여행 준비로 인한 모든 수고로움이 나를 방해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평소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목욕 치료(Bade-Cour)에 착수했다. 그것이 나에게 매우 혐오스러운 일이었음을 안다.

내가 집에 머무르는 데는 훨씬 더 깊은 이유가 있으며 나에게 필요하다. 나는 한 번쯤은 그런 강력한 기분전환 없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영구적인 외부 활동에 나를 묶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급진적인 도피에 대한 욕구가 갑자기 생긴 우울한 성격이 나에게 닥치는 것을 도울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뿐만 아니라 나중에도 그렇다. 이제 책들을 다 읽었다. 지금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아마도 다시 시작할 것이고,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나 자신을 던져 리워야단(Leviathan)처럼 자신을 제지하지 않고는 멈출 수 있다는 확신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 자신을 이해하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더 깊은 의미에서 나 자신에게 다가갈 필요성을 느낀다. 나는 여기, 그 자리에 머물면서 내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가을이 끝날 무렵에 나는 더 오랜 기간 동안 적당히 외국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를린으로의 짧은 여행처럼 열정적이거나 열정이 집중된 특징을 지녀서는 안 된다.

나의 우울함을 내가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것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엄청난 지적 노력의 도움으로 억제되어 왔다. 내가 내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승인하고 모든 면에서 나를 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주신 그분께 거듭 감사드린다. 비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분은 나의 노력을 기쁘게 보셨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그분의 도움으로 최대한 인내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위로이다. 내 자신 안에서 나는 작가로서의 나의 일, 그의 힌트에 순종하고 모든 지상적이고 세속적인 고려에 대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개인적으로 실족했다 하더라도 나의 감각을 달랠 수 있을 것임을 하나님 앞에서 알고 있다. 내가 작가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양심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에,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도록 순수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순수함, 이타심, 근면함이 세상의 눈에는 광기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르게 보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분의 눈에 아무리 순수하다 해도, 감히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다른 것을 원하신다. 변혁(Metamorphose)을 나타내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꿈틀 거리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감히 베를린으로 여행할 수 없다. 낙태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조용히 지내야하며, 너무 격렬하게 일하지 말고, 실제로는 거의 격렬하게 일하지 말고, 새로운 책을 시작하지 말고, 나 자신에게 다가와서 내 우울증에 대한 생각을 진정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 이런 식으로 나의 우울이 해소되고 기독교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우울증을 막기 위해 지적인 노력으로 우울증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해 왔다. 이제 용서의 하나님께서 죄책의 일부를 잊어버리셨다는 믿음으로, 그 믿음 안에 내가 존재한다. 나는 산만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죄책과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내가 죄책을 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잊어버리셨다고 생각해야 하며, 따라서 나 자신도 용서 안에서 죄책을 감히 잊어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