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카리스아카데미
- 도예베르트
- 키르케고르
- 헤겔
- 칼 바르트
- 자유주의
- 내면의 감금
- 시인의 실존
- 절망
- 영원한 행복
- 반틸
- 믿음
- 계시현상학
- 말씀의 거울
- 토대주의
- 능력의 말씀
- 콩깍지가씐사랑 #카리스아카데미 #복수 #사랑 #허다한죄
- 결론의 비학문적 후서
- 계시
- 죽음에 이르는 병
- 문화 개신교
- 말씀
- 변증학
- 현상학
- 말씀은 거울이다
- 반토대주의
- 카리스 아카데미
- 후기 토대주의
- 미학
- 라이프니츠
- Today
- Total
프라우스
NB15:101, JP IV 4030 (Pap. X2 A 436) 1850년 본문
NB15:101, JP IV 4030 (Pap. X2 A 436)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세계의 비밀로 악에 대한, 죄에 대한 탁월한 작은 부분이 존재한다. 정확히 그것은 토대가 없는 것(the groundless)**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가 Daub을 인용하는 것을 보고 즐거운데, Daub 역시 가룟 유다에 대해 이 입장을 취하며 악을 기적의 특별한 범주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가 나중에 이 관점을 포기했고, 그의 작품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가정」에서 악을 부정적인 것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을지라도 말이다.
J. M이 ‘죄의 이해 불가능성’이 제한된 지식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는 전적으로 옳다. 적절한 과정은 우리가 계속해서 추측하는 것(speculating)이고 그때 확실히 죄에 도달할 것처럼 보인다. 아니, 죄의 이해 불가능성(Ubegribelighed)은 명확히 죄의 본질이다.
또한 죄를 다음과 같이 볼 수도 있다. 한 때 죄에 굴복했지만 지금은 구원받은 인간을 데리고 와서 그에게 저런 방식으로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아니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람이 더 순수할수록, 그에게 악은 더 이해 불가능하다.
나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 죄의 이런 이해 불가능성(Ubegribelighed)을 입증할 수 있다. 안티 클리마쿠스가 악에 관련하여 가능성과 현실성이 그것들이 달리 작용했던 것의 역전된 방식으로 서로 관계함을 정확하게 보여주었다. 다른 경우들에서, 현실성은 가능성보다 더 높다. 그러나 악과 관련하여, 현실성은 가능성보다 더 낮다. 가능성으로서의 선은 불완전한 것인 반면, 현실성으로서의 선은 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으로서의 악은 현실성으로서의 악보다 더 좋다.
그러나 물론 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성을 가능성으로 분해하는 것이다.(요하네스 클리마쿠스를 보라.) 그러나 저 경우 현실성이 가능성보다 더 낮다면, 물론, 그것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는 현실성일 때만 진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분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능성으로 분해될 때, 그것은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은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존재하는 반면, 가능성에서의 선은 더 낮은 것이고, 선을 이해하는 것은 질적으로 선을 실현시키는 것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침투 불가능한 것(the impenetrable)
**임의의 불연속성(the arbitrary discontinuity)
[a] Julius Müller. Doctrine of Sin 1st part pp. 457ff.
[d] 그러므로 우리는 반성에 대하여, 죄를 짓고 있거나 죄 지었음을 고려할 때, 술 취한 자의 상태처럼 그의 상태를 서술하기 쉽다. 그는 만취했거나 말하자면, 그의 의식은 만취해서 완전히 어두움에 잠겨버린 것이다. 여기에 토대가 없는 것(the groundless)의 범주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이 사람 속에서 놀라운 에너지가 있어, 스스로를 어두움 가운데 내던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것이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임을, 본질적으로 의지 속에 부여된 것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술 취함 자체는 의식 아래로 침몰하는 것인 반면, 술주정뱅이가 강한 술독에 빠져 술 취한 것으로 죄를 짓는 것처럼, 죄 역시 마찬가지이다.
'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JP 3:2649, 1848년 (0) | 2023.08.05 |
---|---|
Journal NB 15(1850년)은 여기에서 시작하십시오 (0) | 2023.07.16 |
기독교 강화와 설교의 차이점, NB:120, Pap. VII1 A6, 1847 (0) | 2023.07.06 |
사회성, 사랑의 역사, NB:118, Pap. VIII1 A4 (0) | 2023.07.06 |
FF:36, Pap.II A 595 (0) | 2023.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