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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본받음에 대하여...(Pap. X4 A354) 본문
아래 번역은 구글 번역의 도움으로 덴마크어를 옮긴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SKS 24, 386, NB24:105 / JP 2, 1904, p. 349.
하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본받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본받음"(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자기 학대도 아니고, 위선도, 행위로 말미암은 의도 아니다. ret forstaaet, altsaa ikke til Selvplagelse, ei heller til Hyklerie og * Gjernings-Retfærdighed o: s: v :) 기독교는 시도, 신화도, 추상적 의미에서의 이념도 아니라는 보장, 이것이 아마 개신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다.
"본받음"은 "단독자"를 각각 개인으로 이상과 관계하게 한다. 보라,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신화이고 시라는 것에 바리케이드를 놓는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본받음을 제거하고, 내면성을 은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이상도 아니고 모범도 아니고 다만 사상(idea, 이념)에 불과한 지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모든 개인은 그가 어디있는지 걱정하면서, 이 모범과 관계해야 한다.) 인류 안에서의 개인, 단독자, 그들은 그저 견본에 불과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하는 견본이다. 여기에는 이상과 관계하는 어떤 사고도 있을 수 없다. 이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그리고 인류(Mskslægten)'라는 사상(idea)이 존재한다. 당신과 나를 위해 만세!
맞다. 이 경우는 더욱 미친 것처럼 전복되었다. 그리스도가 롤 모델일 때, 각 개인이 분투해야 할 때, 여기에서 분투해야만 하는 것은 고난이다. 따라서 "너는 해야 한다."는 명령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실행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 관계를 바꾸었다. 이상을 위해 분투하는 것, 그것은 교만, 무례한 교만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한다. (하이버그 교수가 Clara Raphael의 서문에서 말한 것을)
여기에 다시 우리는 위선을 갖는다. 노력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누구도 이 노력을 교만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이 면제는 조용하고 겸손하다.
이상을 추구하며 모험한다면, 그 모습이 될 것이다. 고난이 시작되었을 때, 그를 돕는 것은 명확히 '당신은 해야만 한다'는 이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 난센스도 없다. 당신은 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것을 혐오스러운 교만이라 부른다. 따라서 고난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고난은 교만에 대한 형벌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는 야단스럽다. 즉, 모든 각각의 개인들이 아무리 멀리 떠나 있을지라도, 이상과 관계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전반적인 감독을 수행하는 이유다. 개신교의 의식은 사람들을 보내고, 전체적인 대략적인 양을 처리하고, 이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각 개인을 이상이 아닌, 인류와 관계하게 한다. "인류"는 이상을 사상으로, 추상적 이념으로 만들 수 없다. (대중은 "이상"과 관계할 수 없다.) 그때 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이것은 신화인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야기는 시적 분출과 기분인가?
오, 루터, 루터여! 이것이 개혁이 그렇도 쉽게 진행되는 이유다. "세속성"이 이해할 때,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 당신, 정직한 사람이여, 당신은 우리가 얼마나 교활한지 생각하지 않았는가! 왜 당신의 등 뒤에서 일어날 일을 막지 못했는가!
보라, 이것이 루터에게 개혁이 그렇게도 쉬웠던 이유다. 왜냐하면 "세속성"은 일찍이 기독교 세계 속에서 쉬운 길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문제를 다시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루터의 것 속에 있는 진를 놓치는 것 없이) 왜냐하면 "세속성"은 여기에서 이것이 이 문제를 다시 더 엄격하게 만드는 문제라는 것을 또한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받음Efterfølgelsen이 정의를 수호하고 그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가장 온화한 형태의 변증법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기독교가 단독자와, 모든 단독자와 관계한다. 단독자는 이상과 관계해야 한다. 이것이 그가 얼마나 무한히 멀리 떠나 있는지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라도 말이다. 그때, "인류"는 대단히 중요해지고, 기독교는 시와 신화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극장판 선포가 된다. 왜냐하면 극장과 교회의 차이에 대한 보증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본받음", 그 진지함, 이 정신차림(sobriety)은 개인을 단독자로 만드는 데 있다. 왜냐하면 개인은 이상과 관계하고, 자기 자신을 관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도, 신화도 아니다."
아마도 David Friedrich Strauß(1808-74), Ludwig Feuerbach(1804-72), Bruno Bauer(1809-82)와 같은 이름을 가진 좌파 헤겔적 종교 비판을 언급한 것이다. 1840년까지 널리 퍼졌다.
*Clara Raphael의 서문에서 말한 것
그녀[Clara Raphaels]의 체념(resignation)은 수도원적인 것도, 가톨릭적인 것도 아니고, 개신교적인 것이다. 세계로부터 하나님께 도피한 것은 세계의 부정이 아니라, 신적인 샘물 속에서 정화시키는 목욕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세상에, 싸움고 수고로 돌아올 것이다. 이렇게 참여함으로써, 세계를 정화시킬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Virgin of Orleans를 상기시키는 무언가 있다. Clara에 영향을 준 것 없이 남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 숭고한 인물이 본질적으로 가톨릭적이고, 수녀같은 면을 지닌 것처럼, 진짜 개신교에서 수도원적인 Clara가 아니라, 일종의 이에 대한 반성이고, 이것이 고상하게(특별하게) 이 책의 끝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덴마크어
Pap.X4A354»Efterfølgelsen.«
I Catholicismen er der dog mere Mening just fordi man ikke ganske har sluppet Efterfølgelsen.
»Efterfølgelsen« (ret forstaaet, altsaa ikke til Selvplagelse, ei heller til Hyklerie og *Gjernings-Retfærdighed o: s: v:) afgiver egl. Garantien for, *at Χstdommen ikke bliver Poesie, Mythologie, Idee i abstrakt Forstand – hvad den noget nær er blevet i Protestantismen.
|[150] »Efterfølgelsen« sætter »den Enkelte« hver Enkelt i Forhold til |24, 385 Idealet. See, det er *at sætte Pinden for, at Χstd. er Mythologie og Poesie.
Men i Protestantismen] er (ved at afskaffe Efterfølgelsen og ved den skjulte Inderlighed) omtrent naaet, at Χstus ikke er Idealet, Forbilledet, (til hvilket hver Enkelt skal forholde sig, redeligt vedgaaende, hvor han er) men Idee. Og Individerne i *Slægten, de Enkelte, de ere Exemplarer, blot Exemplarer, hver gjør sig] lystig paa sin Viis, der kan da ikke være Tanke at have med Idealet at gjøre. Der er overhovedet intet Ideal, der er en] Idee|151: Χstus – og Mskslægten. *Hurra for mig og Dig siger jeg.
Ja Sagen er endnu galere forrykket. Naar Χstus er Forbilledet, naar hver Enkelt skal stræbe – det er Lidelse at skulle stræbe her. Derfor behøvedes det vel, at det befales: Du skal,] ellers gaaer det aldrig. Nu har man vendt Forholdet, det at ville stræbe efter Idealet det er *Arrogantse, uforskammet Hovmod – saaledes taler vi (*saaledes taler fE Prof. Heiberg i Forordet til Clara Raphael).
See her har vi igjen Hykleriet, man ikke blot fritager sig for Anstrengelsen, nei man gjør Anstrengelsen til Hovmod, saa altsaa Fritagelsen er roesvær|[152]dig Ydmyghed.
Hvis nu da En vilde *vove ud i Stræben efter Idealet – hvad skal det blive til. Det der skulde hjælpe ham, naar Lidelserne begynde var just dette: Du skal, der er ingen Sludder derom, Du skal, og ethvert Msk. skal – i dets Sted hedder nu: afskyelige Hovmod, men derfor ere ogsaa Lidelserne vel fortjente, Straf over Hovmod.
Gud og Χstd. er nøieregnende: hvert enkelt Msk. skal forholde sig til Idealet, hvor langt han saa end er tilbage. Dette er for, at Χstd. kan *holde General-Opsynet] med disse Millioner. |153 Den protestantiske Bevidsthed, den rutter med Msker, regner med meget store runde Summer, fritager os alle fra Stræben efter Idealet, og gjør Slægten til Det der forholder sig – dog vel ikke til Idealet, thi det kan »Slægt« ikke (*en masse kan man ikke forholde sig til »Idealet«) gjør altsaa Idealet til en Idee, en abstrakt Idee – og hvor langt er der saa tilbage til, at Χstd. er Mythologie, Talen om Χstd. digteriske Udgydelser og Stemninger?]
O, *Luther, Luther, ak], derfor gik det saa let med Reformationen, fordi »Verdsligheden« forstod, det er Noget for os! O, Du ærlige Mand, hvor|[154]for betænkte Du dog ikke, hvor listige vi Msker ere! Hvorfor havde Du ikke Øine i Nakken, for at Du *kunde forebygget hvad der skete bag Din Ryg!
See, derfor gik det saa let for Luther, fordi »Verdsligheden« tidligt] saae i dette en nem Vei til at blive Χstdommens Anstrengelse |24, 386 qvit. Og derfor vil det nu blive saa svært, at faae dette Forhold ordnet igjen (uden dog at gaae Glip af det] Sande i Luthers) fordi »Verdsligheden« kun altfor godt forstaaer, at her gjælder det om, at faae Sagen igjen gjort strengere.
Dersom »Efterfølgelsen« ikke anbringes idetmindste og i det Mildeste dialektisk for at holde Justits, og sætte Forholdet i Rette: |155 at Χstd. har med den Enkelte, hver Enkelt at gjøre, som skal forholde sig til Idealet, om det saa kun var for ydmyget at tilstaae, hvor uendelig langt han er tilbage: saa er »Slægten« overgribende], og Χstd. Mythologie,] Poesie, saa er Χstd.s Forkyndelse theatralsk, thi Garantien for Forskjellen mellem Theater og Kirke er: »Efterfølgelsen«, dens Alvor, den Ædruhed, som ligger i, at Mskene gjøres Enkelte, for hver Enkelt at forholde, at skulle forholde sig til Idea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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