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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일기 및 기록물 정리

1848년 이방인의 염려 관련 일기(NB4:117)

by 엉클창 2026. 2. 11.


NB4:117 (Pap. VIII1 A 660)

“이방인의 염려”에서

맺음말 (Udgang)

이제 끝으로 한 마디만 더 덧붙이고자 합니다. 싸우고 계신 분이여, 당신이 누구이든지 간에— 혹시 이 싸움 속에서 시험을 받으며,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염려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신 분이시든지, 혹은 그러한 염려로 인해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우나, 그럼에도 위로를 갈망하시는 분이시든지, 혹은 슬프게도 길을 잃었으나, 여전히 인도를 갈망하시는 분이시든지 간에 말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때때로—특히 각각의 강화가 시작되는 부분에서—그 서술이 충분히 진지하지 않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 이르게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읽으시되, 염려하지 말고 읽어 주십시오. 그리고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인간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부드러워지는 것, 곧 눈물 속에 담긴 미소를 통하여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진지함’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참된 진지함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에는 단지 어두운 침울함일 뿐인 것도 많고, 세상적 염려에 짓눌린 마음의 짜증스러움,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거슬러 자신의 운명을 고발하는 심령의 완고함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의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에 분주한, 어리석고도 헛된 바쁨도 있습니다. 그런 바쁨은 긴 생애 동안 다른 모든 것에는 시간을 내지만, 정작 유일하게 필요한 단 한 가지를 위해서는 단 한 순간도 내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물이 고통을 덜어 주는 동안,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그 미소로 인간을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경건한 강화, 곧 건덕적 설교가 하려는 일 가운데 하나이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하는 일입니다. 건덕적 설교는 엄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과제의 요구를 굳게 지키며, 의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미소를 이끌어 낼 수 있어야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로운 이에게는 혐오스러운, 요란한 웃음의 경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하는 이에게 그런 웃음을 권하는 것은 뻔뻔한 무례일 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눈물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미소, 곧 우는 일을 유익하게 만들어 주는 그 미소입니다. 이 미소는 대개 감사조차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도움이 된 것이 눈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아, 마치 아이에게 도움을 받고도, 자신이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느끼면서도, 그 아이가 바로 도와준 이였다는 점은 제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너무 미숙해서 도울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소는 너무 진지하지 않아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바로 이 미소를 건덕적 설교가 구애하는 것은 아닙니다. 건덕적 설교는 어떤 미소에도 구애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미소가 싸우는 자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건덕적 설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참으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자신이 그와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가 잠시나마 모든 다른 속박을 잊고 미소의 끈을 당기도록, 그 미소를 그에게서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입니다.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지함에 속하는 일입니다. 제 말을 다시 믿어 주십시오. 사람이 영원 안에서 진보하고, 영원을 향해 성숙해 가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는, 그가—더 많이 고난을 겪을수록(그가 시험받는 무고한 고난이든, 혹은 그가 스스로 초래한 형벌이든)—더욱 부드러워지고, 이 눈물 속의 미소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는 것이 결코 약함이 아님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주 단순한 예를 하나 떠올려 보십시오.

지혜로운 한 노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 강인해지고, 나이가 더해질수록 더 단단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에서 많은 일을 겪었고, 온갖 세상적 시련 속에서 시험을 받아 왔습니다. 이제 그의 삶의 조건은 안정되었고, 근심이 없으며,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행복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시련의 시절에도, 누구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세상적 궁핍 앞에서도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일로는 울지 않는 법이지. 사람은 가능한 한 돕는 것이지.”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한 젊은 시절의 친구와 함께 이 삶과 그 시련들—특히 생계에 대한 염려—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어린아이가, 아무런 악의도 없이, 순전한 무구함으로 하나의 말을, 하나의 질문의 형태로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보십시오. 노인은 미소를 지었고, 바로 그와 동시에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기묘한 일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어째서 어린아이의 한 마디 말이, 그것도 엄숙한 대화 한가운데에 순진하게 떨어졌을 때, 이런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세상살이의 염려가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쓰라리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며, 그에 대한 어떤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어리석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는 오히려 올바르게 말합니다. 다만, 아주 정당한 이유로, 그 쓰라림을 전적으로 빠뜨릴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경우에 말합니다. “그래, 네가 말한 것은 옳다, 내 아이야.” 그리고는 아이를 돌려보내며, 더 이상 그 대화에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아이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화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 아이는 장난스럽게 지혜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자신은 자신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또 어떻게 아이러니한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이의 말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세월 동안 경험해 온 그 쓰라린 것들을—그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모든 것을—하나의 인상으로 한꺼번에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는 아직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아, 그런데도, 그런데도 아이가 말한 것은 본질적으로 참입니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우리는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우리를 깊이 움직입니다. 아이의 순진함 덕분에, 우리는 잠시나마 전혀 편견 없이, 마치 영원 안에 있는 사람처럼, 세상살이의 무게 앞에서도 한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진 상태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이가, 정작 가장 옳은 말을 하게 된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이 옳은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또 이 신비한 지혜자가 바로 한 아이라는 사실—아, 곧 우리가 한때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는 사실—이 어찌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아직 시험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스승들, 곧 백합과 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