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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340:14, Pap. VII1 A 143, 1846, JP: 1348. 본문
340:14, Pap. VII1 A 143, 1846, JP: 1348.
. . . .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불변하신다.” 속죄는 하나님이 변하셨다고 가르치는데, 이 모든 것은 검증을 통해 견딜 수 없는 비인간적인(anthropopathic) 표현이다.
즉, 하나님의 추상적 불변성에 대한 추상적 사고에 의해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인간이 정확히 이것을 할 수 없다고 가정해 보라.
착각은 인간이 추상적으로 사고함으로써 하나님이 불변하신 것처럼 자신도 불별하게 하고 싶어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반대에 대한 속죄의 표현은 다음과 같다. 속죄는 하나님은 불변하신 반면, 인간은 변한다고 가르친다. 혹은 죄로 인해 변화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불변하신다고 선포한다. 사실 모든 반대는 본질적으로 두 번째 명제(인간이 죄를 통해 변화된다는 것)를 공격한다. 그러나 교활하게도 첫 번째 명제, 즉 하나님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심오한 모습이 있는 척 한다. 반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존재했다고 가정되는 것에서 변화되었는지를 묻는 대신, 전체 문제를 하나님의 속성(Prædikamenter)에 대한 환상적인 싸움으로 변모시킨다. 하나님이 실제로 변화되었다면,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선포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화해를 위해 속죄는 결코 두 당사자가 모두 변화 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당사자가 옳다면, 그가 변화되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불변성(속죄에서 선포된) 것이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다른 이유로 그것은 속죄가 아니다: 그 경우 한 당사자는 결코 당사자가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비인격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화해는 태양을 숭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태양을 숭배하는 이교도 땅에서 갑자기 일식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달래려고 노력한 후 다시 빛나고 화해했다고 믿었다면,이것은 부조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현상의 불변성이 인격적 접근과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현상과 관련하여 인간은 이 변화가 저 자연 현상과 관련이 있는 방식으로 변화될 수 없다. 인간이 죄인인지 여부는 태양이나 달과의 관계에 상응하는 변화가 아니다. 화해한 두 당사자 사이의 관계는 한 당사자(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변화가 상대방(하나님)의 불변성과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도 모든 것이 혼동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죄의 변화와 그 현실의 중요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양심은 직접성에서 존재하며, 선과 악의 차이를 무한히 강조한다. 이제 추상적 사고를 통해 인간이 더 이상 양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추상적이 되거나, 윤리가 완전히 증발하고 형이상학적으로 휘발되었다고 가정해야 한다(반대*가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감각 영역과 관련하여 인간을 제한한 것처럼, 인간이 창조되었고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면,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를 위해 한계를 설정했다. 상상을 통해 인간은 백만 마일 떨어진 곳의 사물을 볼 수 있지만, 그의 감각적인 눈은 그렇게 멀리 볼 수 없다. 그가 아무리 오랫동안 상상의 허상에 굴복하더라도, 그의 눈은 결코 더 멀리 볼 수 없다. 직접성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 사고와 환상 속에서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다(이 자기 창조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자신의 파괴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당연히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인간의 가장 고집스럽고 목이 뻣뻣한 추상조차도 직접성을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반대로, 그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끊임없이 그것을 의식한다. 직접성은 그의 발판이며, 그가 아무리 멀리 떠돌아다녀도,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해져도, 그는 결코 발판을 완전히 놓을 수 없다. 물론 이 스케치는 이 막다른 골목의 종착점을 그린 것이다.
* 따라서 이러한 반대는 어지럽게 무한으로 나아가는 폭발한 인격(예를 들어, 하나님의 목소리와 악마의 목소리를 구분할 수 없다고 믿었던 아들러**)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멀리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윤리학은 가능한 한 빨리 한 걸음 더 나아가 양심에 따른 도덕적 직접성의 길을 따르도록 설득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 시작된다. 상상력의 덕택으로 그렇게 멀리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누군가가 “그렇게 조금 보는 것은 수고할 가치가 없으므로” 그의 눈을 감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누군가가 그의 도덕적 직접성을 포기한다면(즉, 그것을 포기하려고 시도를 한다면), 윤리는 이것을 죄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눈을 감을 수 있다. 왜냐하면 눈은 단지 한가지일 뿐이지만, 도덕적 직접성은 한계라는 의미에서 인간 자신이다. 그러나 또한 뿌리와 땅의 의미에서도 인간 자신이다.
**아들러
아마도 A. P. 아들러의 Studier[연구](코펜하겐, 1843), 70-71쪽의 다음 구절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것은 선했고, 천사들까지도 섬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했을 때 - 이제 당신은 폐지되었다, 율법! 바울은 이렇게 썼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을 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썼다(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니라). 사람이 독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지점, 뱀이 자기 꼬리를 물어뜯는 지점이 있다. 율법은 같은 말씀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죽은 편지는 강도와 왕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항복하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같은 말을 반복한다: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율법 전체가 폐지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율법이 쉿 소리를 냈다. 율법에서 마치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 같은 조롱의 소리, 비방의 소리, 마치 결박된 거인을 조롱하는 난쟁이처럼 멀리서 말하며 예수를 조롱하는 악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이 났다. 일꾼들아, 망치로 쳐서 율법을 무너뜨려라! 그러자 그들은 쇠와 막대기로 망치로 쳐서 무너뜨렸고, 모든 것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장면이다.”
아들러를 “무한에서 어지럽게 빠져나온 폭발한 개성”으로 묘사한 그의 『노글 프레디케너』(Nogle Prædikener, 몇몇 설교)(코펜하겐, 1843; ASKB U 9)의 서문을 보면, 어느 날 밤 “방에서 무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회고한다. 구주께서 일어나서 들어가서 이 말씀을 받아 적으라고 명령하셨다.
“최초의 인간은 영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이 하나님의 영을 육체에 묶을 때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육체에 결합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이런 식으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었고, 생각은 세계도 없고 몸도 없이 자기 자신에만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영은 몸에서 분리되어 세상과 분리되었고, 인간 자신이 생각 자체가 영을 몸에서 분리하고 영을 세상과 분리했을 때 인간은 필멸자가되었고 세상과 몸은 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은 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의 적이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갔을까요?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것을 만들어낸 세상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령입니다. 세상 자체가 악령을 창조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에게 내 글들을 불태우라고 하셨고, 그 순간부터 성경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6권부터 마지막까지 설교와 연설이 예수님의 은혜로 쓰여진 것이며, 제가 그 매개체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러: 아돌프 피터 아들러(1812~1869), 덴마크 신학자; 1840년 “가장 중요한 형태의 고립된 주관성”(Den isolerede Subjectivitet i dens vigtigste Skikkelser)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1841년부터 보른홀름 섬의 하슬레와 뤼츠커에서 교구 목사로 활동했다. 1842년 『헤겔의 객관적 논리학에 대한 대중적 강의』(코펜하겐, 1842; ASKB 383)와 1843년 『스튜디어』(위 책 참조)를 출간했고, 1844년 『노글 프레디케너』(코펜하겐, 1843) 서문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이 주교 J.의 판결을 받아 직위 해제되고 1845년 명예롭게 연금으로 퇴임했다. P. 마이너 주교에 의해 초기 정신 질환의 징후로 판단되었다. 해임된 후 아들러는 <나의 정직과 해임에 관한 논문>(Skrivelser min Suspension og Entledigelse ved- kommende)을 출간했다(코펜하겐, 1845; ASKB U 10). 또한, 그는 Nogle Digte[몇 편의 시](코펜하겐, 1846, ASKB 1502), Studier og Exempler [연구와 예시](코펜하겐, 1846, ASKB U 11), Forsøg til en kort systematisk Fremstilling af Christendommen i dens Logik [기독교 논리에 대한 간략한 체계적 제시 시도] (코펜하겐, 1846, ASKB U 13); 및 Theologiske Studier[신학 연구] (코펜하겐, 1846, ASKB U 12)를 저술하고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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