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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JJ:115, JP V 5664 (Pap. IV A 107), 레기네 올센 본문
JJ:115, JP V 5664 (Pap. IV A 107)
1843년 5월 17일[i]
내게 믿음이 있었다면, 나는 레기네 곁에 남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이제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며칠 동안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 옳았다. 나는 처음부터 약혼하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이후로 나는 그녀를 기사도적으로 대했다. 미학적이고 기사도적 의미에서, 나는 그녀를 그녀가 나를 사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사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나에게 자존심을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중에 그녀의 울음으로 나를 불안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ii]
나는 “유죄인가/무죄인가”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iii] 그것은 분명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내용을 담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iv] 모든 소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시적인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시적으로 희석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현실을 가진 것이다. 그녀는 어떤 “연극의 공주”[v]*도 아니며, 그녀는 가능하다면 나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vi]
하나님이여, 그것은 내 유일한 소망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부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인간적으로 나는 완전히 옳았다. 나는 그녀에게 내 고통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매우 고귀하게 행동했다. 나는 순전히 미학적으로 볼 때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했는지를 완전히 수행했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행복을 그렇게 많이 고려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가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직접 그것을 요구했을 때[vii] (그녀가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던 일이었고, 그것은 잘못된 무기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그것을 요청했을 때,[viii] 나는 그녀에게 선행을 행하고 내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어느 순간 피곤해졌다면, 나는 그녀가 직접 요구했다는 설명으로 그녀를 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그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다.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철저히 살피며, 그녀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주의했는지를. 그 이후로 나는, 아마도, 어떤 젊은 여자에게도 말을 건 적이 없다. 나는 모든 약혼자가 나를 불완전한 존재, 악당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시대를 위해 봉사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경매에서 망치가 내려가면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팔리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과거에 대한 약간의 정직함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도 나의 기사도는 분명하다.
내가 그녀를 나의 미래 아내로서 나 자신보다 더 존중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녀의 명예를 나의 명예보다 더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면, 나는 침묵했을 것이고, 그녀와 나의 소망을 이루며 그녀와 결혼했을 것이다. 수많은 결혼이 작은 이야기들을 감추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나의 첩이 되었을 것이고, 차라리 그녀를 죽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설명하려면, 나는 그녀를 끔찍한 일들에 대해 알게 해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관계, 그의 우울함,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영원한 밤, 나의 방황, 나의 욕망과 과도함.[ix]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끈 불안 때문이었기에 하나님의 눈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강인함과 능력을 동경했던 사람이 흔들린다면, 내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여백에서
*어떻게 그런 젊은 여자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누가 짐작했겠는가? 결국, 그것은 매우 미숙하고 단지 허영심에서 비롯된 생각임이 이후에 드러났다. 만약 실제로 어떤 요소들이 존재했다면, 내가 약혼을 파기한 방식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 방식은 분명히 유연성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에는 자존심과 교만으로 지나치게 억제되었다가, 이후에는 겁쟁이처럼 행동했다.
[i] 1843년 5월 17일 수요일,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여전히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다.
[ii] 1841년 10월 11일, 키르케고르가 레기네와의 약혼을 최종적으로 파기했을 때, 레기네는 소리를 지르며 “이것이 나를 죽게 만들 것”이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키르케고르는 이를 자신이 그녀의 양심에 살인을 저질렀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그녀가 실제로 죽었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의 마음에 깊은 죄책감을 남겼다.
이 사건은 키르케고르가 1847년 5월, 자신의 일기 NB (Pap. VIII 1 A 100)에 기록한 내용을 통해 나타난다. 이는 그의 개인적 고뇌와 자기 성찰이 그의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사유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iii]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의 원고 작업 중 이미 불행한 사랑(Ulykkelig Kjærlighed)이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구상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키르케고르 소장본에 적힌 그의 메모(Pap. IV A 215)를 통해 확인된다.
1843년 5월 베를린 체류 중, 키르케고르는 이 아이디어로 돌아가 “유죄인가/무죄인가”(Skyldig - Ikke Skyldig)라는 제목의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제목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해당 시점에서였다. 이 원고에서 두 개의 단편만이 보존되었으며, 그중 하나는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듯한다:
“내 명예가 걸리지 않았고, 내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나를 떠났다면, 그게 다 무엇이겠는가-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Pap. IV B 142)
이 이야기는 이후 《인생길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에 포함되며, “유죄인가/무죄인가”라는 제목으로 정리되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삶의 단계들(SKS K6)의 텍스트 해설(53-60쪽)을 참고하라.
[iv] 1년 반 동안: 이는 키르케고르가 약혼을 파기한 이후로 1년 반의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한다.
1841년 10월 11일 레기네 올센과의 약혼을 파기한 이후, 키르케고르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내적 고뇌와 성찰을 통해 철학적/문학적 작업에 몰두하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시기는 그의 주요 작품들인 《이것이냐 저것이냐》, 《두려움과 떨림》, 《반복》 등을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v] 유명 여배우를 뜻함
[vi] 키르케고르는 1843년 5월 30일 코펜하겐으로 돌아온 후에야 레기네가 요한 프레데릭 슐레겔(Johan Frederik Schlegel, 1817-1896)과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그 시점까지 레기네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여전히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vii]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하여(Mit Forhold til ‘hende’, 174,29)에서 레기네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그녀는 조금은 눈치챘다. 종종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내가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는 허락을 받는다고 해서 당신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그녀는 또 한 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예요.’” (Pap. X 5 A 149,7)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평생 동안 당신께 감사드리겠어요. 설령 제가 작은 장롱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요.’” (Pap. X 5 A 149, 25)
[viii]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와 약혼을 파기한 바로 그날, 그녀의 아버지였던 테르켈 올센(Etatsråd Therkel Olsen, 1784-1849)에게서 그녀 곁에 남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글 ‘그녀’와의 관계에 대하여(Mit Forhold til ‘hende’, 174,29)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녀를 떠난 뒤, 나는 즉시 극장으로 갔다. 왜냐하면 에밀 보센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 막이 끝난 후, 내가 2층 관람석에서 나가려는데, 1층 관람석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나와 말씀하셨다: “잠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함께 그의 집으로 갔다.
그는 말했다: 그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그녀를 죽게 만들 것입니다. 그녀는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제가 그녀를 진정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에게 간청합니다, 그녀와 헤어지지 말아 주십시오.
진실로 그는 위대했다. 그는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내 결정을 고수했다.
(Pap. X 5 A 149,12, pp. 163f.)
이 사건은 키르케고르가 자신의 결정이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아버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고수하며, 그 결정을 종교적, 윤리적, 실존적 의미로 사유했다. 이 경험은 그의 주요 철학적 작품들에 나타나는 체념과 신앙, 그리고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탐구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ix] 키르케고르가 언급한 그의 ‘욕망과 방종’(lyster og udskejelser)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입증되지 않았으며, 그가 무엇을 구체적으로 지칭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 키르케고르의 아버지인 미카엘 페데르센 키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 1756-1838)은 덴마크 서부 윌란 지역의 새딩(Sædding)에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양치기로 일하다가 12세 무렵 코펜하겐으로 이주해 그의 외삼촌이었던 양말 판매상 닐스 안데르센(Niels Andersen) 밑에서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1780년, 그는 코펜하겐에서 양말 판매상의 시민권을 취득했고, 8년 후 설탕, 시럽, 커피 같은 대규모 수입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사업 수완은 그를 매우 부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는 40세의 나이에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은퇴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투자자와 지주로서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1794년 5월, 그는 키르스티네 뢰이엔(Kirstine Røyen)과 결혼했지만, 그녀는 1796년 3월 23일 자녀 없이 사망했다. 이듬해인 1797년 4월 26일, 그는 안네 쇠렌스다터 룬드(Ane Sørensdatter Lund, 1768-1834)와 재혼하여 일곱 자녀를 두었다:
1. 마렌 키르스티네(Maren Kirstine, 1797-1822)
2. 니콜리네 크리스티네(Nicoline Christine, 1799-1832)
3. 페트레아 세베리네(Petrea Severine, 1801-1834)
4. 페테르 크리스티안(Peter Christian, 1805-1888)
5. 쇠렌 미카엘(Søren Michael, 1807-1819)
6. 닐스 안드레아스(Niels Andreas, 1809-1833)
7.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키르케고르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살아남은 자녀는 키르케고르 자신과 그의 형 페테르 크리스티안 뿐이었다. 키르케고르 가족은 1803년부터 1805년까지를 제외하고는 코펜하겐에 거주했다. 1809년, 미카엘 페데르센은 코펜하겐 Nytorv 2번지에 있는 집을 구입했고, 그는 1838년 8월 9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키르케고르는 이 집에서 1840년까지 살았고, 이후 1844년부터 1848년까지 다시 그곳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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