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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스
Pap. VIII1 B 55:4, 1847; 사랑의 실천, 나의 것, 너의 것, 본문
Pap. VIII1 B 55:4, 1847.
나는 에로스적사랑[Elskov]과 우정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지상에서의 삶을 더 행복하게(어쩌면 본래보다 더 사소하게) 만들며, 더 만족스럽고, 더 평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한 인간이 여러 면에서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며, 그런 점에서 이러한 상호 도움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을 거부하는 잘못된 자존심보다 더 옳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왜 이런 모든 것이 사랑[Kjerlighed]이라 불리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적 사랑이라 불리는지 말이다. 이것은 ‘나의 것’과 ‘너의 것’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질 때에만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석
이 글에서 키르케고르는 에로스적 사랑(Elskov)과 우정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인간 사이의 상호 의존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진정한 사랑(Kjerlighed), 특히 기독교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가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으로 간주하는 것은 ‘나의 것(Mine)’과 ‘너의 것(Yours)’이라는 소유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를 통해 드러난다. 즉, 기독교적 사랑은 단순한 인간적 관계를 넘어, 자기희생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을 요구한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사랑의 본질과 기독교적 사랑의 독특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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